최초의 원정대 | 12명의 영웅들

2014-02-12 09:00 | 조회 25803
최초의 원정대






검은 구멍에서 바람이 휘돌아 나왔다. 발치의 돌이 부스러져 떨어졌다. 둘 다 무한한 공간으로 메아리치며 멀어져 갔다.

그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구멍을 내려다보았다. 저 하늘만큼이나 가늠되지 않는 까마득한 깊이가 저 구멍 아래에 있을까?

 

“두렵군.

 

초원의 전사인 타양의 입에서 가장 먼저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진이 타양의 목덜미에 오른팔을 얹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더 무서워지는데.

 

“델피나드를 주름잡던 너희가 그런 소리를 하면 나 같은 놈은 기절이라도 해야 하나.

 

루키우스가 말을 받으며 구멍의 가장자리로 다가가 위험천만한 자세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에안나가 깜짝 놀라 루키우스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 모습을 보던 아란제비아가 웃었다.

 

“제일 겁이 없는 건 시인 당신이네 뭐.

 

“시인님은 겁이 없는 게 아니라 만용을 부린다니까. 델피나드에서도 그랬지.

 

루키우스를 끌어당겨 놓은 에안나는 머리를 한 대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루키우스가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을 연기하고 있는데 타양이 물었다.

 

“뭐가 보이긴 하던가?

 

“보이긴 개뿔. 위나 아래나 안개뿐이야.

 

진은 돌을 하나 주워 멀리 던져 보았다. 다들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진이 눈짓하자 타양도 돌을 줍더니 몇 걸음 물러났다가 힘껏 던졌다. 말의 목도 꺾어놓는 페레의 힘이었으나 역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진이 말했다.

 

“적어도 이백 보는 넘는다 그거군.

 

진은 친구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동료들이 대화하는 동안 아란제브는 구멍 주위를 살펴보고 있었는데 가장자리를 따라 걷다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아란제비아가 소리쳤다.

 

“어디 가요?

 

대답은 없었으나 얼마 후 도로 나타난 아란제브는 자신을 보는 동료들을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너비를 알아내기엔 가장자리가 그리 고르지 않군.

 

그러자 그때까지 혼자 생각에 잠겨 있던 키프로사가 고개를 들었다.

 

“곡률로 반지름을 구해보려고요? 좀 더 멀리 가보면 가능하겠네요.

 

원주상의 두 점의 값으로 곡률을 구하고, 곡률의 역수로 반지름을 구해보려는 발상은 기하학에 능한 델피나드 마법사다웠다. 아란제브가 빙그레 웃었다.

 

“물론 원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아뇨. 원일 거라고 생각해요. 여긴 세계의 중심이잖아요?

 

그들 두 사람만이 마법사였으므로 다른 사람들은 이해 못할 이야기였다. 진은 두 사람을 흘끔 보았지만 키프로사가 눈길을 주지 않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루키우스가 손을 흔들어댔다.

 

“마법사들만 아는 암호 얘긴 그쯤 해둬. 일단 움직여보자고. 가다보면 뜻밖에 아래로 내려가는 우아한 승강기가 나올지도 모르잖아?

 

“그 승강기에는 물론 손잡이도 있겠지?

 

올로가 말을 받자 루키우스가 웃었다.

 

“그럼! 어쩌면 안내하는 아가씨도 있을지 모르지.

 

원정대는 일어나 구멍 가장자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는 끝없는 황야, 왼쪽으로는 무한한 구멍을 바라보면서. 기이한 대조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가득 채워 이윽고 넘쳐흘렀다. 이곳의 존재도, 이곳에 존재하는 자신들도 경이였다. 세상이 숨긴 비밀은 언젠가 밝혀질 운명이었다.

 

그들은 정말로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아쉽게도 승강기는 아니었지만. 허공에 떠 있는 돌계단이었다. 징검다리라고 해야 할지도 몰랐다. 어쨌든 한 걸음씩 내려갈 수 있도록 이어져 있었다.

 

“근사한데.

 

에안나가 감탄하면서, 그러나 조금 두려워하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나란히 내려다보던 멜리사라가 말했다.

 

“끊겼는데.

 

멜리사라는 눈이 좋았다. 위쪽 계단과 중첩되어 얼른 보면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분명 끊긴 곳이 있었다. 더 눈이 밝은 타양이 와서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아니. 그 아래로 다시 이어져.

 

초원의 종족인 페레의 시력은 인간의 두 배가 넘었다. 타양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곳은 내려가서 확인할 도리밖에 없었다. 올로가 불안정하게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결국 이리로 내려가야 한단 말인가?

 

“아저씨는 내 옷자락만 잡고 따라오면 걱정 없어.

 

아란제비아가 그렇게 말하며 깔깔거렸다. 엘프인 그녀에게 이 정도 계단쯤은 별로 무서울 것도 없었다. 키프로사가 말했다.

 

“얼마나 내려가야 할지는 아무도 몰라. 어두워지도록 바닥에 다다르지 못할 수도 있어. 그렇다고 쉽게 돌아오지는 못할 테고.

 

“그렇더라도 안 갈 텐가?

 

이곳에 다다른 후 처음 듣는 이녹의 목소리였다. 그제야 이녹이 얼마나 들떠 있는지 느껴졌다. 늘 나직하고 침착하던 목소리가 흥분으로 약간 갈라지기까지 했다. 그러자 아란제브가 답했다.

 

“가야지요.

 

눈에서 눈으로 마음이 옮겨갔다. 루키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겠군. 젠장, 아직 세상을 뒤집어엎을 명작도 쓰지 못했는데. 나라는 끝내주는 놈이 이 세상에 있었다는 걸 어떻게 후세에 알린다지.

 

누구든 스스로의 안녕을 돌보고자 했다면 이런 곳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문득 진이 곁에 선 바위를 툭툭 쳤다.

 

“이름을 남기고 싶나? 여기에 새기고 가면 어떨까?




그날은 이상한 날이었다. 더 이상 다를 수 없을 정도로 혈통이며 성품이 판이한 그들 모두가 언뜻 어린아이 같은 진의 제안에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아란제브가 바닥에서 돌조각을 하나 집어 들더니 입속으로 주문을 외우고는 내밀었다.

 

“이거면 되겠지.

 

돌조각은 한쪽 끝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키프로사가 먼저 받아들고 바위 위에 이름을 썼다. 마치 모래사장에 쓰는 것처럼 간단했다. 이어 동생 오키드나에게 건네자 오키드나가 삐딱하게 이름을 쓰더니 키득키득 웃으며 타양에게 돌조각을 건네주었다.

 

“이러면 될까.

 

타양은 공용어로 쓴 자신의 이름이 어색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진을 불렀다. 이어 쓴 진의 필치는 날렵했다. 진은 멜리사라에게 돌조각을 건넸다. 멜리사라는 이름을 쓴 후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 뒤에 성까지 적어 넣었다. 진은 그때까지 멜리사라의 성을 몰랐는데 어쩐지 들어본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 다음은 나야.

 

멜리사라가 꾸물거려서 조바심이 났는지 루키우스가 돌조각을 빼앗듯 낚아채어 쥐고 이름을 적었다. 그 다음은 에안나였다. 단정하게 이름을 남긴 에안나는 아란제브에게 돌조각을 건네며 말했다.

 

“선생님 차례예요.

 

아란제브가 쓰고, 대녀인 아란제비아가 건네받고, 다시 올로가 받아들고, 올로가 이녹에게 건넸다. 이녹은 간단히 이름만 쓰더니 나이마를 돌아보았다.

 

“그대의 이름은 내가 써 주겠네.

 

나이마는 영문도 모른 채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글을 알지 못했다.

 

 

* * *

 

 

태초에 어머니가 만물을 만든 후, 그들 열두 명은 태어난 자리로 돌아온 최초의 귀환자들이었다. 그들이 걸었던 길은 오랫동안 잊혔으나 그들이 세상으로 돌아와 한 일은 영원히 잊힐 수 없었다.

 

바위에 새겨진 이름들은 이후 수천 년이 흐르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찾아오는 자들은 가장 먼저 이 이름들을 보게 될 것이다.

 

키프로사 데이어

오키드나

타양 칼지트

진 에버나이트

멜리사라 리볼라

루키우스 퀸토

에안나 니무쉬

아란제브

아란제비아

올로

이녹

나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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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4
  • 토요일에만나요 @에안나 | 50레벨 | 선창자 | 하리하란
    흠....
    2014-02-12 11:58
  • 잼배 @에안나 | 53레벨 | 흑마술사 | 엘프
    2014-02-12 12:21
  • 타이란 @에안나 | 53레벨 | 환영사 | 누이안
    이거 전민희 작가님의 "전나무와 매", "상속자들 -상-", "상속자들 -하-" 이렇게 읽고 보시면 좀 더 재밌게 보실 수 있습니다 ㅎㅎ
    2014-02-12 12:22
  • 귤맛오랜지 @루키우스 | 50레벨 | 저승사자 | 누이안
    스토리 헠헠
    2014-02-13 10:50
  • 은무결 @루키우스 | 53레벨 | 마법사 | 엘프
    서버순서
    2014-02-14 20:31
  • 골든위크 @진 | 50레벨 | 밤 노래꾼 | 하리하란
    시작해볼까 후훗
    2014-02-16 21:15
  • 익양곡 @진 | 30레벨 | 방랑 사제 | 하리하란
    ㄹ..리볼라였다니...ㄷㄷ
    2014-05-09 00:28
  • 아단 @오키드나 | 50레벨 | 포식자 | 누이안
    하하하하핰
    2014-05-25 13:49
  • 향월랑 @키프로사 | 52레벨 | 추적자 | 엘프
    "진의 필치는 날렵했다."
    오타 아닌가요?
    '필체' 아님?
    2014-07-23 12:17
  • Johansson @진 | 53레벨 | 흑마술사 | 하리하란
    ㄴ필체는 글씨체이며 필치는 글씨에서 풍겨지는 멋 이런겁니다...여기선 필치가 맞겠죠
    2014-07-24 18:17
  • 아키먹는기린 @진 | 51레벨 | 정신 파괴자 | 하리하란
    헠헠스토리너무좋다
    2014-08-06 13:16
  • 거친숨결 @진 | 50레벨 | 흑마술사 | 누이안
    사랑해요 전민희
    2015-04-15 16:30
  • 거친숨결 @진 | 50레벨 | 흑마술사 | 누이안
    전나무와 매 상속자들 상하 다보고 보기시작하니까 설렘설렘
    2015-04-15 16:30
  • 짠틴07 @누이 | 50레벨 | 포식자 | 페레
    진이 정말로 진 에버나이트 라는이름을 좋아하는군요. 아무런 고민없이 진 에버나이트를 세겨넣었네요 ㅋㅋ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서도..
    2016-03-23 0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