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트라 대 여제' 9화. | 신대륙의 인물들

2014-04-30 09:19 | 조회 7270





가짜 파비트라를 태운 수레는 비파 항구의 팔바니 총독의 인도를 받아 약속 장소로 향했다.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이미 상대의 수작이 훤히 보였다. 저만치 보이는 수레는 황제만이 타는 수레가 아니었거니와 주위의 근위들도 정복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가짜 파비트라의 수레가 멈추자 숨어 있던 오스테라 군이 모습을 드러내어 수레를 겹겹이 포위했다. 팔바니 총독이 항의했지만 안전하게 파비트라를 사로잡았다고 생각한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스테라 군을 지휘한 페오시스 장군은 오스테라의 명문가 출신으로 오스테라 총독과는 사돈간이기도 했다. 페오시스는 이샤마 황제 폐하는 어디 계시냐는 팔바니의 물음은 들은 척도 않고 당당히 파비트라의 수레에 드리운 휘장을 젖히게 했다. 그리고 파비트라로 가장한 시녀를 향해 이샤마 황제 폐하께서 바쁘셔서 이곳에 함께하지 못했는데 너무 아쉬워하지 말라며 조롱하기까지 했다.

시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페오시스가 무슨 소리를 하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수상쩍은 느낌을 받은 페오시스는 파비트라의 얼굴을 아는 카타니아 황녀를 불러왔다. 카타니아는 가짜 파비트라를 보자마자 분통을 터뜨렸다.

 

“감히 이런 잔재주를 부리다니!

 

자존심 강한 페오시스는 농락당했다는 생각에 크게 분개했다. 그는 가짜 파비트라 역을 맡은 시녀가 감히 황제를 참칭했으니 불태워 죽이겠다고 선언했다. 보란 듯이 장작을 쌓아올리고 시녀를 포박해 말뚝에 매달았을 때 시녀의 입이 겨우 열렸다.

 

“펴, 편지…….

 

수레 안을 뒤져보니 과연 편지가 한 통 나왔는데 겉봉에 ‘오스테라의 반역자들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편지를 펼쳐보니 ‘오스테라는 세 가지 중대한 죄를 저질렀다. 파비트라 여제 폐하가 보낸 사신을 능멸한 죄, 이샤마 황제 폐하를 모시지 않았으면서도 허위로 고한 참칭의 죄, 그리고 반역자 카타니아를 보호하고 손을 잡은 반역의 죄가 그것이다. 여제께서는 반역 도당을 용서치 않을 것이나 지금이라도 무기를 버리고 투항한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는 내용이 류이진 특유의 조롱을 듬뿍 담아 씌어 있었다.

 

류이진은 카타니아가 이들과 동행했다는 사실까지는 몰랐지만 손을 잡은 것은 틀림없다고 여겼으므로 당당히 죄목을 추가해 놓았다. 게다가 편지 말미에는 파비트라 역할을 한 시녀가 오스테라 총독의 이종 조카라는 사실도 친절하게 덧붙여져 있었다. 가짜 역할을 한 시녀의 목숨을 위해 류이진이 나름 취한 배려였다. 놀란 페오시스의 명령으로 급히 장대에서 내려진 시녀는 그제야 말문이 트여 더듬거리며 살려달라고 호소했다.

 

듣자 하니 이리로 오기 전에 류이진이 시녀에게 알로카시아 독을 소량 입에 넣었다가 뱉게 한 모양이었다. 독 때문에 성대가 붓고 혀가 마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 덕택에 자신이 누구인지 밝힐 수가 없어 페오시스가 파비트라를 조롱하고, 이어 시녀를 화형에 처하겠다고 매다는 꼴이 만천하에 공개되고 말았다.

 

그간 오스테라는 황제에게 반기를 들지 않은 체하며 전쟁을 뒷조종하려 했지만 이제 불가능해졌다. 전면전을 벌이려면 빠르게 끝장을 보아야 했다. 그 시작은 비파 항구일 수밖에 없었다.

페오시스는 서둘러 비파 항구를 포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황제에게 반역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병사들이 동요하는 바람에 진형을 갖추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겨우 공격 태세를 갖추었을 때 다급한 소식이 후방으로부터 병사들을 타고 퍼져 페오시스에게 도달했다. 군대 뒤쪽에서 낯선 군대가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깃발조차 없어 어디의 군대인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오스테라 병사들은 새로운 군대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바람에 적시에 전투 태세를 갖추지 못했다. 그 사이 낯선 군대는 노도처럼 들이닥쳐 오스테라 군의 후방을 박살냈다. 교전이 벌어지고 나서야 적들의 가슴에 새겨진 문양을 발견한 병사들이 두려워하며 외쳤다.

 

“연의군이다!

“사라졌던 연의군이 나타났다!

 

이스밀과 나디르가 키운 연의군의 명성은 오스테라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탑의 도시를 공략할 때 수비가 너무 쉽게 무너졌기에 연의군 일부가 어딘가에 남아 있으리라고 여겼지만 이렇듯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연의군은 소문대로 정예병들이었다. 한 명 한 명이 평범한 병사 셋과도 맞서 싸울 실력자들인 데다가 상황에 따라 천변만화하는 진형은 오스테라 군의 혼을 빼놓았다.

 

그제야 페오시스는 퇴각 명령을 내렸지만 달아나려 해도 앞쪽에는 비파 항구가 버티고 있었다. 곧 성문이 열리고 파비트라가 직접 이끈 군대가 진격해 나왔다. 황제의 친정을 알리는 깃발이 휘날리는 것을 본 오스테라 병사들은 혼란에 빠졌다. 선봉에 선 파비트라가 외쳤다.

 

“짐이 바로 제국의 주인인 파비트라 황제다! 너희가 감히 황제에게 맞서려 하는가?

 

파비트라의 일갈을 들은 병사들이 상당수 대열을 이탈했지만 페오시스의 가문을 섬기는 직속 군대는 전열을 가다듬고 파비트라를 사로잡으려 했다. 그러나 여자라고 얕보았던 여제의 군대 운용 실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마적 출신인 파비트라의 직속병들은 무자비하게 칼을 휘두르며 좌우를 지켰고 파비트라는 쏜살같이 달려와 페오시스에게 칼을 겨눴다. 페오시스는 한 번 속은 것 때문에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여제께서는 속임수에 능하신가본데 이번에는 진짜라는 걸 어떻게 믿을지 모르겠군요? 게다가 무기를 쓸 줄 아신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는데…….

 

파비트라는 대꾸하는 대신 세 박자 만에 페오시스의 목을 날려버리고는 말했다.

 

“너희가 짐에 대해 아는 건 젊은 여자라는 것뿐이겠지. 그렇지 않은가?

 

페오시스가 죽고나자 독 안에 든 쥐가 된 오스테라 군은 패주했다. 고작 수백 명이 산과 들로 달아났을 뿐, 1만여 명에 이르는 주검이 들판에 뿌려졌다.

카타니아는 또다시 용케 달아났다. 카타니아를 놓쳤다는 소식을 들은 류이진은 몹시 분해했지만 보고를 받은 파비트라는 침착했다.

 

“카타니아는 많은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지만, 제국은 한 사람의 힘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한 사람이 부술 수 있는 건 이미 균열이 가 있던 성뿐이지. 우리가 할 일은 균열을 막는 것이지 한 사람을 뒤쫓는 것이 아니야.

 

전투가 마무리되자 연의군을 이끈 나디르가 비파 항구에 입성해 드디어 파비트라를 알현했다. 오랜만의 재회였다. 파비트라가 오스테라의 바닷가를 뛰놀던 소녀였을 때 처음 알게 된 나디르는 파비트라와 이스밀 부부를 둘러싼 튼튼한 성곽 같은 벗이었다. 그렇게 늘 곁을 지켰지만 이스밀의 요청으로 탑의 도시의 총독이 되어 떠나갔었다.

파비트라 앞에 무릎을 꿇은 나디르가 지난번에 왜 탑의 도시를 오스테라 군에게 내주고 미리 퇴각했는지, 지금껏 어디에서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는지를 보고하고 있는데 파비트라가 옥좌에서 내려와 나디르의 손을 부여잡았다. 나디르는 목이 메어 더 말을 잇지 못했다. 파비트라의 손등으로 굵은 눈물이 떨어지자 파비트라도 눈을 꽉 감았다.

한참 뒤 나디르가 말했다.

 

“오늘부터 저의 주군은 파비트라 황제 폐하이십니다.

 

그 전까지 나디르의 주군은 이스밀이었다. 어려서부터 오늘날까지 줄곧 그랬다. 그 사이 파비트라가 황제가 되었든 아니든 그건 나디르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나디르와 이스밀은 요람에 누워 있던 시절부터 함께 한 사이였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음마를 하고, 나란히 말 타기를 배우고, 함께 목검을 휘두르며 자라났다.

나디르의 부모는 이스밀의 부모를 섬겼기에 나디르도 나이가 들며 이스밀을 주군으로 여기게 되었지만 둘의 우정만은 그대로였다. 이스밀이 황도에 숨어들어가 약혼녀인 파비트라 황녀를 구해오던 때도, 파비트라를 위해 반역을 결심하던 때도, 절치부심 끝에 두 번이나 황도를 공략할 때도, 마침내 파비트라를 황좌에 앉히고 나서 이샤마 때문에 물러나기로 결심했을 때도 나디르는 늘 이스밀 곁에 있었고 한 번도 반대하지 않았다.

 

현명한 주군이자 친구였던 이스밀을 일생 동안 전적으로 따른 것은 나디르에게 한 점의 후회도 없는 일이었지만 단 한 가지만은 그도 후회했다. 이스밀이 비파 항구의 총독이 된 후 고향인 탑의 도시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때만은 반대했어야 했다. 자신과 연의군이 곁을 지켰더라면 이스밀이 그리 허무하게 쓰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떠나온 나디르가 이스밀의 신변을 걱정하는 편지를 보냈을 때 이스밀은 비파 항구의 사람들도 자신을 잘 따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다. 하지만 역시 항구 놈들 따위는 믿을 것이 못 되었다. 충성심도 명예도 모르는 잡놈들에게 주군을 맡겨 놓고 고향에서 한가롭게 지낸 자신을 나디르는 용서할 수가 없었다.

 

나디르는 가장 먼저 비파 항구를 떠나자고 주청했다. 이스밀을 죽인 배신자들 곁에서 한시라도 머물 수 없다고 했다. 배신자 바르토크는 죽었고 백성들은 참회하고 있다고 말해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나디르가 보기에는 유서 깊은 고도인 탑의 도시의 왕자나 다름없었던 이스밀이 물고기나 잡아먹고 사는 비파 항구 따위에 머문 것부터가 잘못된 일이었다.

 

나디르는 류이진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처음 만나자마자 ‘경은 그간 뭘 했소?’하고 쏘아붙였을 정도였다. 평소 잘난 체 하던 류이진은 바로 곁에 있었으면서도 이스밀을 지켜내지 못했다. 류이진이 그 점을 얼마나 뼈아프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나디르가 알 바 아니었다.

류이진도 파비트라가 목숨을 걸고 직접 비파 항구를 탈환하는 동안 나디르와 연의군은 어디에서 태평하게 숨어 있었느냐고 따질 수도 있었겠지만 일단은 그러지 않았다. 이스밀의 죽음에 대해서는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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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0
  • 김상술 @키프로사 | 20레벨 | 주술도적 | 누이안
    게임안에선 언제 나올?까
    2014-04-30 10:01
  • 뚜쉬뚜쉬 @올로 | 52레벨 | 흑마술사 | 엘프
    이걸 겜 내에서 보면 꿀잼일텐데...
    2014-04-30 17:26
  • 명석몽 @아란제브 | 50레벨 | 자연의 노래꾼 | 페레
    책으로 나오겠지.
    2014-04-30 20:08
  • 시온 @키프로사 | 13레벨 | 사제 | 누이안
    게임안에서? 누굴 나온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은 죄다 죽고 망령상태로 하리하랄라야의 폐허에 존재...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유물의 힘으로 버텼던 이샤마 황태자 뿐
    2014-05-01 15:08
  • 쿠광쾅쾅 @루키우스 | 50레벨 | 포식자 | 페레
    페레스토리는 언제 나올려나
    2014-05-02 11:12
  • 라라사 @이녹 | 53레벨 | 애도의 악사 | 하리하란
    핰핰핰핰 파비트라 멋있다ㅜㅜ
    2014-05-03 12:07
  • 지브로 @루키우스 | 50레벨 | 포식자 | 누이안
    아, 이번 화에선 나도 감동의 눈물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2014-05-12 02:38
  • 아글리아14 @크라켄 | 4레벨 | 사랑의 초심자 | 누이안
    헣헣허헣
    2014-08-09 16:26
  • 네르엘라14 @크라켄 | 13레벨 | 전쟁 인도자 | 엘프
    아 근데 비하인드 스토리 책으로도 나오나?
    2014-08-09 16:26
  • 찹쌀떡 @안탈론 | 53레벨 | 길잡이 | 페레
    이스밀에 나디르에 파비트라정도면 쌍화점 한번 찍어야 하는거 아니냐?!
    2014-12-30 2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