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트라 대 여제' 14화. | 신대륙의 인물들

2014-07-16 09:39 | 조회 13180







제국의 변경과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초원은 수백 년 넘게 페레들의 땅이었다. 한때 그곳에서는테미라는 나라가 일어나 하리하랄라야 제국을 위협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목민의 제국이었던 테미는 한편으로는 정착민이 되고픈 유혹을 이기지 못해서, 한편으로는 정착 제국의 치밀함을 갖추지 못해서 결국 무너졌다.

 

페레의 옛 땅 중 비교적 온화한 초원의 띠와 본래 정착민의 땅이었던 하슬라 일대는 하리하란의 거주지가 되었다. 그러나 변경에 해당하는 매사냥 고원과로카의 장기말들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로칼로카 산맥 일대는 제국의 영토이되 여전히 페레들의 땅으로 남았다.

처음에는 제국도 새롭게 복속된 페레들을 어떻게든 다스려보려 했지만 곧 그게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페레들은 유목민이어서 정착 제국의 문물 및 제도와는 잘 맞지 않았다. 정착민의 방식을 강제한다는 것은 유목민의 생존 기반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초원은 유목 외에 다른 삶의 방식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을 이주시켜 정착민으로 끌어들이기도 어려웠다. 현실적으로 정착지가 모자란 데다 기존 백성을 위험으로 내모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리하란 정착지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가 여러 번 있었지만 이주자들은 초원의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지 못하고 대부분 이탈했다. 나머지는 페레들과 비슷한 삶의 방식을 받아들여 유목민이 되었다. 그 땅에서는 그렇게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기에.

결국 제국은 초원에 도시를 세우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흩어져버린 페레들은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뿐, 제국에 대한 소속감은 거의 없었다. 이등시민으로서 제국 중심 도시의 출입이 제한되는 것이나 공직에 등용되지 않는 것 따위는 그쪽으로 갈 일도 없는 페레들에게 별 의미도 없는 제약이었다. 그저 공물만 때맞춰 바치면 제국에 복속되기 전에나 다름없이, 다시 말해 변화 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 , 그곳은 변화가 멈춘 곳이었다.

 

알키미가 황태자 이샤마를 숨길 곳으로 매사냥 고원을 택한 것은 그곳이 제국의 치안력이 미치지 않는 땅이기 때문이었다. 파비트라의 소식을 알 수 없었던 알키미로서는 다할의 치세가 얼마나 갈지 짐작하기 어려웠기에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달아날 필요가 있었다. 알키미의 고향인 남방의 아므르타를 택하지 않은 것도 현명한 선택이었다. 다할은 두 사람이 사라지자 제일 먼저 아므르타 일대를 샅샅이 뒤지도록 했다.

 

매사냥 고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한 알키미와 이샤마는 얼마 안 가 페레 무리를 발견했다. 페레들은 처음에 두 사람을 사로잡으려 했다. 그런 식으로 붙잡힌 자들은 페레 부족에서 일종의 노예로 부려졌다. 가축들조차 인격적으로 아끼는 페레들은 정착민들처럼 노예들을 가혹하게 대하지 않았지만 사고 팔 수 있는 예속물로 여기는 것은 같았다.

그들이 노예를 잡으려 하는 것은 눈사자나 야생 염소를 사로잡아 재산을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때가 되면 이동해야 하는 유목민에게 의미 있는 재산이란 발이 달려 있어야 했다. 발이 달리지 않은 재산을 많이 모으는 것은 기동력을 줄인다는 의미였고, 그건 곧 목숨을 위협하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페레들의 판단은 잘못되었다. 그들이 만난 알키미는 제국 최고의 전사 중 하나였다. 그는 예전에 파비트라와 방랑하던 시절에 몇 번이나 페레들과 맞서 싸워보았기에 페레들의 공격 방식마저 소상히 꿰뚫고 있었다. 알키미는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한 페레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형에 교묘하게 자리를 잡고 페레들의 활보다 조금 더 사거리가 먼 활로 그들을 유린했다. 그들이 육탄전으로 접근해 오자 혼자서 십 수 명을 간단히 박살냈다.

마침내 페레들은 알키미가 범상한 상대가 아님을 깨닫고 물러났다. 그러더니 한 명이 다가와 거리를 두고 멈춰 서더니 외쳤다.

 

“그대는 오래 전에 하늘매 부족의 친구였다. 그렇지 않은가, 여제의 검은 전사여?”

 

하늘매 부족은 가장 오래된 페레 부족 중 하나였다. 그들의 연원은 원대륙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대이주 당시 페레를 이끌었던 대 마라피눈물의 치찰라이가 바로 하늘매 부족 출신이었다. 그 후로 하늘매 부족은 부족의 세력 규모와 관계없이 존중을 받아 왔다.

알키미는 파비트라 및 어린 이샤마와 함께 방랑하던 당시 하늘매 부족의 부락에 머무른 일이 있었다. 그때 그들을 도와 부족 간 전쟁에 참전해 활약했기에 알키미의 존재를 기억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알키미가 누구인지 안 페레들은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알키미와 이샤마를 자신들의 부락으로 초대했다. 그들은 흑곰 부족으로 하늘매 부족과는 선린 관계를 맺고 있었다. 부족 전쟁 당시에도 한 편이었기에 알키미 또한 함께 싸운 전사인 셈이었다. 페레들이 동포 다음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전우였다. 흑곰 부족은 두 사람을 정성스럽게 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키미는 이샤마가 황태자임을 밝히지 않았다. 제국에 좋은 감정이 있을 수만은 없는 페레들에게 제 발로 굴러들어온 황태자란 너무 가혹한 유혹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알키미는 흑곰 부족의 부족장인칸자리 마라에게 파비트라 여제가 배신을 당해 생사를 알지 못하게 됐으며 자신은 다할을 섬길 수 없어 황도를 떠났다고만 설명했다. 이샤마는 우연히 구조해서 동행한 소년인 것으로 미리 말을 맞추었다.

칸자리 마라는 페레는 친구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는다며 자신이 도울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하라고 했다. 알키미는 일단 그들의 부락에 머물게만 해 주면 족하다고 답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흑곰 부족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처음에 이샤마는 페레들과의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그가 과거 페레들과 지냈던 때는 한 살 박이 아기였으니 그 생활이 기억날 리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샤마는 알키미에게 자신을 빈틈없이 돌보려 하기보다 내버려두라고 명했다. 황태자임을 숨기기로 했으니 그에 걸맞게 처신할 생각이었다.

 

극도로 물을 아낀다든가, 가축의 분변을 간직한다든가, 죽은 눈사자를 먹는다든가 하는 페레들의 기묘한 생활 방식은 처음에는 거부감만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샤마는 현명한 소년이었기에 얼마 안 가 그런 풍습 뒤에 숨은 진정한 의미를 알아차렸다.

이샤마는 뛰어난 전사의 재목은 아니었기에 페레들의 전투 방식을 배우지는 못했다. 대신 그는 광포한 야만족으로만 알았던 페레들이 생각 외로 고차원적인 도덕관념과 빼어난 서정성마저 갖췄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자연을 이용하려고만 하는 하리하란과는 전혀 달랐다.

 

그간 이샤마는 정치 다툼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라났다. 아버지는 부재했고, 어머니는 자신을 사랑하긴 했지만 너무나 바빴다. 그는 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바쁜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아들인 자신을 위해서라고 하니 그런 줄 알긴 했지만, 그렇게 해서 갖게 되는 제국에 무슨 근사한 의미가 있는지 실감되지는 않았다. 그가 보아 온 제국은 마치 살아 있는 괴물 같은 존재였다. 사람들은 제국이라는 수레바퀴를 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바퀴에 치여 덧없이 쓸려갔다.

이샤마에게는 정을 붙일 사람이 거의 없었다. 친족이란 든든한 병풍이자 만나기만 해도 즐거운 존재여야 할 텐데, 이샤마에게는 모두 칼을 쥐고 노려보는 원수들이었다.

 

이샤마는 흑곰 부족과 지내는 동안 페레들이 시를 짓는 방식을 배웠고, 눈사자나 가축들과 다정한 관계를 맺는 것에 마음이 움직였다. 그리고 무소유에 가까운 페레들의 생활 방식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점차 그는 왜 어머니가 황제여야만 하고, 자신은 제국을 물려받아야만 하는지에 대해 회의를 느꼈다. 왜 무언가를 가져야만 하고 빼앗기지 않아야만 하는지, 그리고 빼앗긴 것을 왜 피를 흘려서라도 되빼앗아야 하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 무렵, 오스테라에서는 페레를 움직여 변경을 교란할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발니오가 모아들인 책사들은 파비트라가 직접 페레를 정벌하러 출진하지는 못하리라고 보았다. 간신히 되찾은 황도를 다시 비우는 것은 위험 부담이 크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가장 가까운 도시는 호랑이 눈인데, 페레들의 소란이 작다면 그곳의 군대가 움직이겠지만, 규모가 커진다면 결국 탑의 도시에 파병 요청을 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추측했다.

오스테라가 기다리는 때가 그 순간이었다. 방어가 약해진 탑의 도시를 탈환하여 제국을 반으로 가르고, 여세를 몰아 호랑이 눈까지 차지한 후 비파 항구를 고립시킨다. 그렇게 되면 천하의 류이진이라 한들 오스테라와 협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조언자들로부터 그런 계획을 받아든 발니오가 만족스러워하고 있을 때, 한 젊은이가 발니오를 만나기를 청했다. 오스테라의 작은 귀족 가문인 칼리아이의 수장으로 이름은 칼리오 아르카디오라고 했다. 아르카디오는 자발적으로 모여든 조언자의 무리 중 하나였으나 그들과 토론하다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발니오를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이번 위기를 맞아 찾아온 자들과 모두 직접 대화한다는 원칙을 세웠기에 잠시 시간을 내긴 했지만 발니오는 새파랗게 젊은 방문객에게 큰 관심을 품지 않았다. 하품을 하는 발니오 앞에서 아르카디오가 말했다.

 

“그자들의 계획은 안이합니다. 그들은 전쟁을 장기놀이처럼 보고 있습니다. 이쪽에서 졸을 움직인다고 해서 저쪽에서 그걸 반드시 잡으러 온다고 보십니까?”

 

“그게 졸이라는 걸 모르게 하자는 게 아닌가. 페레는 한때 테미 제국을 세워서 제국을 파멸시킬 뻔 했던 적이란 말이야.”

 

“여제가 그까짓 걸 구별 못하리라고 보십니까? 여제는 다할을 물리치고 황도를 되찾아 자신이 풋내기가 아님을 입증했습니다. 그리고 류이진은 어떻습니까? 제국에서 둘을 찾아보기 어려운 모략의 귀재가 그런 눈속임에 속아 넘어간다고요? 메레디스는 또 어떻습니까? 그는 절대로 엉덩이가 가볍지 않습니다.”

 

듣다 못한 발니오가 짜증이 나서 말했다.

 

“그럼 자네는 어찌하잔 말인가? 다른 멋진 계략이라도 있나?”

 

그러자 아르카디오는 자신만만하게, 그 시기 오스테라의 어떤 책사도 할 수 없었을 말을 했다.

 

“그렇게 물으시니 제 생각을 말씀드리죠. 대륙에서 평균적으로 가장 영리하다는 오스테라에서 나름 뛰어나다는 사람들이 모두 모였는데도 조언자들의 눈이 왜 어두울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승리해야 한다는 전제를 버리지 못하고 무의미한 계략을 짜내기 때문입니다. 황도를 되찾은 여제는 잠시 어려움을 겪을지언정 곧 전 제국에 지배력을 회복할 것입니다. 다할이 죽은 이상 달리 황제가 될 자도 없습니다. 우리가 변방부터 차근차근 공략하려 해도 천재적인 류이진과 진중한 메레디스가 지키는 두 도시는 굳건합니다. 그 둘을 등 뒤에 남겨두고 황도를 공략한 여제가 성공했을 때부터 저울추는 이미 기울었습니다. 그러므로 단언컨대, 저항하다가 파멸을 자초하기보다 하루빨리 여제에게 항복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아르카디오는 발니오의 집에서 쫓겨났다. 이미 파비트라와 대결하기로 결정한 오스테라에서 그의 의견은 금기 그 자체였다. 누구도 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니, 귀를 기울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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