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트라 대 여제' 15화. | 신대륙의 인물들

2014-07-30 09:15 | 조회 11917







그 해, 오스테라 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쌓아온 생존 방식을 잊은 듯했다. 피하기도, 이기기도 힘든 전쟁이 하루하루 다가온다는 생각, 자유를 잃고 노예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합리적 판단을 앗아갔다.

전쟁 준비는 착착 진행되어 갔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이 징병을 피해 오스테라를 탈출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생업을 잊고 소요를 일으켰다. 음악 소리도, 구경거리도 사라졌다. 도시의 많은 부분이 사실상 마비 상태가 되었다. 상거래는 오스테라 사람들의 심장 같은 것이었기에 멈추지 않는 곳은 시장뿐이었다.

 

발니오에게서 쫓겨났지만 칼리오 아르카디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진짜 전쟁이 다가오면 차라리 지금을 두려워하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는 몇몇 유력 귀족들을 만나 보았지만 그들은 발니오와 마찬가지로 투항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를 내쫓아버렸다. 결국 최후의 방법만이 남았다.

아르카디오는 아내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라고 일렀다. 그의 아내는 탑의 도시 출신이었다. 혼자 남은 그는 오스테라에서 가장 번화한 광장으로 가서 광장을 바라보고 있는 작은 점포를 임대했다. 그런 후, 아르카디오는 점포의 입구를 부숴버리고 내부에는 사람들이 내버린 폐자재를 모아와 기묘한 연단을 쌓았다. 부러진 조각상의 머리들이 맨 아래에 깔려 있었다. 곳곳에 매어 놓은 찢어진 비단이 깃발처럼 펄럭거렸다.

 

하루에 수만 명이 지나가는 광장이었기에 기묘한 연단은 곧 관심을 끌었다. 쓰레기더미 같기도 했지만 묘하게 예술품 같은 구석도 있었다. 그 위에 상복 차림으로 선 아르카디오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말없이 굽어보고 있었다. 한참이나 그러고 있자 어떤 사람이 소리쳐 말을 걸었다.

 

“그 위에서 뭘 하슈?

 

“애도하고 있습니다.

 

“애도라니? 누가 죽었소?

 

“아직은 아니지만, 곧 죽게 될 겁니다.

 

“그거 안됐구려. 가까운 사람인 모양이군.

 

“네. 저 자신이니까, 저 이상으로 가까운 사람이 없긴 하겠군요.

 

연단의 높이 때문에 대화는 외침으로 오갈 수밖에 없어 곧 주위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다. 사람들은 겉보기에 멀쩡해 보이는 아르카디오가 왜 죽게 되는지 궁금해서 각종 추측을 쏟아냈다. 누군가가 언제 죽느냐고 묻자 아르카디오는 자신이 반 년 뒤에 죽게 되며, 아마 자신의 죽음을 애도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아 미리 애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친구도 가족도 없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뇨.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땐 그들도 이미 죽어 있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의 죽음도 함께 애도하고 있습니다.

 

점점 궁금함이 증폭되자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물었다.

 

“대체 영문을 모르겠군. 반 년 뒤에 당신과 그들이 죽게 되는 이유가 뭐요?

 

“오스테라 인이기 때문입니다.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순간 불쾌한 표정이 되어 서로를 보았다. 아르카디오가 곧 닥칠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모두 알아차렸던 것이다.

 

“이봐, 지금 우리 모두가 곧 여제의 군대에게 학살당할 거다, 뭐 그런 소릴 하고 싶은 거요?

 

“일방적인 학살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패전하게 될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히 생각해봐도 알 수 있습니다.

 

곧 사방에서 말이 쏟아졌다. 화를 내며 시비를 걸거나 비난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진지한 질문도 적지 않았다. 오스테라 인은 감정보다 현실적 판단이 앞서는 사람들이었고, 제국에서 가장 영리하고 합리적인 도시라는 자부심도 컸다. 그리고 그간 겉으로 표현하지 못했을 뿐, 다가올 전쟁의 결과에 물음표를 품고 있는 사람은 적지 않았다.

아르카디오는 사람들의 질문에 차례차례 대답했다. 단지 질문에 대답할 뿐, 연설을 하거나 선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모여드는 사람들은 점차 더 많아졌다.

 

아르카디오는 평범한 달변가가 아니었다. 그의 대답은 짧고 예리하면서도 핵심적이었다. 그리고 감정적 대응에 말려들지도 않았다. 모여든 사람들이 화를 내면서도 그의 대답을 듣고 싶어서 소요를 자제할 정도였다. 그러나 곧 치안대가 나타났다. 치안대가 선동 및 소란 혐의로 그를 체포하려 하자 아르카디오가 말했다.

 

“난 내 점포에 가만히 서 있다가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했을 뿐입니다. 사람들에게 내 말을 들으라든가, 모이라는 말 한 마디도 한 적이 없죠. 다시 말해 총독 각하의 법을 전혀 어기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러거나 저러거나 치안대는 일단 아르카디오를 체포해 갔다. 그러나 이튿날이 되자 그는 바로 풀려났다. 그의 말대로 아무 혐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다못해 광장 가운데 서 있기라도 했다면 선동 목적이라고 몰아갈 수라도 있었을 텐데 아르카디오는 일부러 점포를 빌렸다. 상업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오스테라에서는 자기 점포에서 무슨 짓을 하든 자기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의 신분이 귀족이라는 점도 항변에 도움을 주었다.

 

아르카디오는 다시 광장에 나타나 느릿느릿 연단 위로 올라가 섰다. 소문을 듣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아르카디오는 새롭게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다. 질문은 더 어려워졌지만 그의 대답에는 막힘이 없었다.

아르카디오를 보러 오는 사람들은 하루하루 많아졌다. 결국 다시 체포당했지만 이번에는 점포 앞에 모인 사람들이 아르카디오의 이름을 연호하며 항의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정보를 주고받았다.

 

전쟁의 공포에 휩싸인 오스테라에서 수십 일 만에 아르카디오는 가장 유명한 이름이 되었다. 아르카디오가 분석해 준 오스테라의 상태 및 발니오의 안이한 대응책, 탑의 도시와 비파 항구의 정세, 여제가 보여준 전략과 연승 등에 대한 정보가 오스테라를 들끓게 하자 발니오도 여론을 견디다 못해 아르카디오를 불렀다. 전략 회의 자리에 불려온 아르카디오에게 발니오가 말했다.

 

“이런 일을 벌인 건 분명히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겠지. 좋네. 우리가 자네의 말을 무조건 들어준다면 어떤 전략을 제시하겠나? , 여제에게 항복하라는 말만 빼고 말해보게.

 

아르카디오는 그런 조건에서라면 할 말이 없다고 거절했지만 그들은 고향의 미래와 자유를 위해 차선책이나 차차선책이라도 말해보라고 계속 졸라댔다. 아마도 젊었기에, 결국 아르카디오는 끝까지 거절하지 못하고 한 가지 의견을 말했다.

아르카디오의 말을 들은 발니오와 참모들은 크게 놀랐다가 곧 희색이 만면해졌다. 과연 생각지도 못한 계책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아르카디오가 뒤이어 한 말을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넘겨버렸다.

그날 아르카디오는 분명히 경고했다. 이것으로 시간을 벌고 여제를 궁지에 빠뜨릴 순 있겠지만, 미래에 더 큰 복수를 부르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그리고 그런 일이 닥치면 분노한 여제가 오스테라를 잿더미로 만드는 것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그 무렵, 흑곰 부족에서 지내던 알키미는 파비트라 여제가 황도를 탈환했다는 소문을 전해 들었다. 그는 즉시 칸자리 마라를 찾아가 황도로 돌아가겠다고 알리고 이샤마를 찾으러 갔다. 이샤마는 페레 아이들과 함께 호숫가에 앉아 낚시를 하고 있었다.

이샤마는 십 년 넘게 낚시를 해 온 페레 아이들보다 모든 면에서 서툴렀다. 하지만 아이들의 행동을 조용히 관찰하는 능력은 뛰어났다. 알키미가 다가오자 이샤마는 ‘쉿, 지금은 말하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처럼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이샤마의 예상대로 곧 한 아이가 큰 물고기를 낚았고, 아이들은 모두 기뻐하며 춤을 추었다. 이샤마는 그걸 바라보고 있다가 춤에 어울렸다. 물고기를 낚은 것은 한 아이였지만 아이들은 함께 있었던 모두를 칭찬했다. 이어 그들은 물고기를 구워 먹을 준비를 했다. 물고기는 아마 공평하게 나누어질 것이다.

이샤마는 그제야 기다리던 알키미에게 다가왔다. 알키미는 파비트라가 황도를 탈환했고 다할은 죽었음을 알렸다. 그리고 이제 황궁은 안전하니 돌아가자고 말했다.

이샤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안전하겠지. 황제 폐하는 완벽한 분이니까. 그런데 내 즐거움도 그곳에 있을까?

 

“폐하께서 그 모든 어려운 일을 해내시는 것이 오직 전하를 위해서임을 모르십니까?

 

알키미의 말은 최근 변화된 파비트라의 생각과 완전히 같지 않았지만 알키미는 아직 알지 못했거니와 그런 차이를 이해할 만한 성격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부모자식 간의 사랑, 혈통적 정당성, 신들이 선택한 제국의 주인과 같은 쪽이 훨씬 받아들이기 쉬운 개념이었다.

이샤마가 대답했다.

 

“그래. 그렇다고 하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하지만 내가 그걸 좋아할지 물어보신 적은 없잖아. 폐하께서 안전하신 것은 기뻐. 다시 황도를 차지하신 것도 기뻐. 하지만 난 궁으로 돌아갈 일보다 저 아이들과 물고기를 먹을 일을 생각할 때 더 가슴이 뛰거든.

 

알키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샤마는 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튿날 이샤마는 순순히 알키미를 따라 칸자리 마라가 마련해 준 말에 올랐다. 말도 잘 통하지 않던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면서. 두 사람은 페레 회합에 참석하러 가는 흑곰 부족의 전사들과 함께 남하했다가 이탈해서 초원의 띠를 통해 황도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그 계획은 안전해 보였다. 그들은 페레 회합이 왜 열리는지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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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1
  • 원웨이 @크라켄 | 55레벨 | 그림자 검 | 하리하란
    흐미
    2014-07-30 10:03
  • 끄적끄적 @크라켄 | 51레벨 | 사냥꾼 | 누이안
    아앙
    2014-07-30 10:06
  • 미린다 @에안나 | 55레벨 | 파괴의 현 | 누이안
    d으으으으 페레회합.. ㅠㅠㅠ
    2014-07-30 10:26
  • 옹알이밥꽃 @루키우스 | 50레벨 | 백기사 | 엘프
    투표 정답은 흑곰 겟!!!!!!!!
    2014-07-30 11:19
  • 명석몽 @안탈론 | 51레벨 | 비전 사냥꾼 | 페레
    이제 하리하랄라야로 쫓기다 잡히는건가.
    2014-07-30 12:24
  • 루아넬 @루키우스 | 50레벨 | 비밀 기사 | 엘프
    근데 왜 초반 투표율은 눈사자가 많았던거여..
    안읽고 걍 투표했다가 읽고나니 흑곰부족이네 망했군..
    2014-07-30 14:49
  • 냥냐냐냥 @루키우스 | 55레벨 | 사제 | 엘프
    루아넬//14화 읽어보세요.

    그리고 15화 본문에도 [그 무렵, 흑곰 부족에서 지내던 알키미는 파비트라 여제가 황도를 탈환했다는 소문을 전해 들었다.] 이런 내용있음
    2014-07-30 15:14
  • 루아넬 @루키우스 | 50레벨 | 비밀 기사 | 엘프
    냥냐냐냥// 봤음..그래서 슬픔..ㅠㅠ
    2014-07-30 15:17
  • 뚜쉬뚜쉬 @안탈론 | 55레벨 | 흑마법사 | 엘프
    암살이라도 하려는건감 흠흠
    2014-07-30 16:06
  • 루어매니아 @진 | 52레벨 | 길잡이 | 페레
    그보다... 전 게임 내에서 페레 아이를 본 기억이 없습니다?! 저 상황 자체가 상상이 안가요!!
    2014-07-30 22:34
  • Aang @루키우스 | 53레벨 | 자객 | 하리하란
    알키미는 아직 알지 못했거니와ㅡ>이샤마는 아직 알지 못했거니와
    2014-08-09 00: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