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의 일기 - 운명의 굴레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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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2. #10
  문은 들어온 쪽뿐 아니라 홀의 맞은편에도 있었다. 그런데 그곳 너머에는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정원에서는 빛이 쏟아져 나왔고,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 속에 황홀한 감정이 가득 찼다.
  나도 모르게 아름다운 정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그러나 나는 투명한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더는 앞으로 나갈 수 없게 됐다.
  홀의 의자 위에 앉아 있던 곤충처럼 생긴 작은 소녀가 날개를 펴며 내게 날아들었다.
  소녀가 내 어깨에 앉는 순간 온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곤 몸이 내 의지와 상관 없이 움직여 홀에 놓인 의자에 앉아버렸다.
   
  h2. #11
  날개 달린 소녀가 내게 말했다.
  "너는 이제 이곳을 지키는 자가 되었다. 신의 정원의 신성한 문지기가 되었다. 수만 년일지 수억 년일지 모르는 세월 끝에 찾아온 네가 이제 앞으로의 긴 세월을 짊어져야 할 것이다."
  수만 년? 수억 년? 긴 세월을 짊어지라고? 무슨 소리야!
  날개 달린 소녀는 생긴 것과 어울리지 않는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이 열렸기 때문에 이 순간부터 정원의 힘은 세상으로 나가게 되었다. 이제 닫을 수 없다. 세상은 변할 것이며, 그 방향이 어느 쪽이 될지는 나도 모른다."
  날개 달린 소녀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문지기는 세상과 정원 사이에 존재하면서 정원의 힘이 이 세상에 조화롭게 흘러나가도록 하는 자이며, 떠날 수도 없겠지만, 만에 하나 네가 대신해 줄 자를 구하지 못한 채 이 자리를 떠난다면 이 세계는 힘의 흐름이 폭주하여 멸망하게 될 것이다."
   
  h2. #12
  자기 할 말만 해버린 채 사라진 날개 달린 소녀 때문에 나는 혼란에 휩싸이고 말았다.
  심연의 여왕에서 벗어나기 위해 문을 열었는데 정원의 문지기가 돼버리다니...
  로사 언니는 당황한 내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정원 안에 가면 나나가 문지기에서 해방될 방법이 분명 있을 거야. 만약, 방법을 찾지 못하면 언니가 나나 대신 문지기가 될게.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줘. 알았지?"
  로사 언니가 정원에 들어가려면 내가 붙잡고 있는 손을 놓아야 한다.
  나는 로사 언니를 믿는다. 잠시 손을 놓더라도 금방 나를 위해 다시 돌아올 거라고.
  일행과 함께 정원에 들어가는 로사 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언니가 빨리 돌아오길 빌었다.
  태어나서 로사 언니와 이렇게 떨어진 건 처음이었으니까.
   
  h2. #13
  시간이 흐른다. 계속 흐른다. 하염없이 흐른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수백 년이 흐른 걸까? 수천 년이 흐른 걸까? 아니면, 수만 년이 흐른 걸까?
  로사 언니는 돌아오지 않는다.
  금방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는데.
  나나는 로사의 손을 놓지 않기 위해 항상 돌아왔는데.
  로사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 나나는 죽었다.
  나나의 일기도 끝이다.
  증오스럽다.
  굴레를 벗어나도 다시 나를 속박하는 이 빌어먹을 운명이.
  딸을 여왕으로 만들기 위해 도구처럼 이용한 레이븐이.
  믿음을 배신한 키프로사가.
  이 빌어먹을 세상이.
  모두 증오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