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저승의 밤 서장5: 저승에서 무슨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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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저승의 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서장 제 5장. 저승에서 무슨 일이

다음 날.

벨리온은 미카엘라의 연구실로, 엘테르와 왕세자는 이니스 섬과 가까운 바라기 마을로 향했다.

마리안과 가나도 전송 마법으로 하얀 숲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인 자작나무 마을에 들어섰다.

끝없이 펼쳐진 꽃밭 한 운데의, 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낀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마을이었지만 느긋이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마을 촌장에게 말 두 필을 징발한 둘은 그대로 하얀 숲 어귀까지 달렸다. 한참을 달리던 둘은 자작나무의 푸른 잎이 점차 하얗게 탈색되고, 초록 잔디 위를 수놓던 꽃잎들이 점차 거뭇해지는 대지 위에서 차갑고 기묘한 빛을 내뿜는 가지들로 바뀌어가자 비로소 말고삐를 늦췄다. 푸르르 거리며 터벅터벅 걷는 말의 발자국 소리와 숨소리 외에는 기괴할 만큼 조용한 곳. 죽은 자들의 영혼이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듣는다는 하얀 숲의 침묵이 두 사람을 둘러쌌다. 죽은 자들이 그 침묵 속에서 영면할 수 있도록, 둘은 조용히 말을 몰았다. 가나 너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이네. 너랑 둘이, 이렇게 말을 타 본 것도."

마리안은 살포시 미소 지었다.

"... 그러게. 가랑돌 평원에서 루키우스님의 반지 찾을 때였지. 손에 피도 그때 처음 묻혀봤고."

"하, 그랬었지? 난 우리 첨 만났을 때 네가 다 타 버린 도적 시체 옆에서도 태연하길래 이미 경험 있나 싶었는데."

"바라기 마을이었지, 네 고향. 최근에 간 적 있어? 엘테르와 왕세자가 이니스 섬으로 건너려면 들러야 하는 곳인데. 네가 그쪽을 담당하는 게 좋았을까."

"가끔 가긴 해. 생선이랑 멧돼지 요리 생각나면. 양부를 만나던가. 아니면 어릴 적 웬수들에게 출세했다고 자랑하고 싶어질 때? 다음에 널 데리고 가면 어떤 표정 지을까, 그 녀석들."

"나 신혼이야. 바뻐."

짐짓 딴청 하는 마리안 때문에 가나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어유, 그러셨어요? 신혼이신 분이 남편 독수공방 시키고 황금 혀 항구까지 내려와서 나 찾는다고 무투회까지 열었어? 그렇게 나 보고 싶었어?"

마리안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기세 좋게 딴죽을 걸던 가나가 머쓱해져서 살펴보니 마리안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뭔가를 참는 듯 가늘게 떨고 있었다.

"... 응."

뺨을 붉히며 수줍게 답하는 마리안. 가나는 속으로 '으악' 비명을 질렀다.

"아... 하하, 그나저나 날이 참 덥네. 안 그래..."

"줄곧."

마리안이 말했다.

"줄곧 생각했어. 네가 또 하나의 목숨을 내게 주었을 때부터."

가나는 저승의 아이였다.

그녀의 부모는 파괴신의 군대를 막기 위해 저승에 남은 사람이었다. 저승의 전쟁이 잠시 소강상태에 이르자 그들 중 몇이 저승에서 나와 현세에 머물며 아이를 가졌다. 하지만 저승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그들은 다시 저승으로 돌아가야만 했고, 그 와중에 자식들마저 저승에 속박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들은 이승에 남겨둘 자녀들의 몸에 '키델라' 라는 고대 이프나 문자를 새겼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뜻임과 동시에, 죽음으로부터 한 번은 부활 할 수 있는 힘이기도 했다.

그리고 가나는 지난 여행에서 그 힘을 마리안을 되살리는 데 사용했다.

"날 위해서 그 소중한 선물을 썼잖아. 부모님이 주신 유산이었는데, 널 이리저리 휘말리게 만든 날 위해서... 그런 네게, 나도 네게 뭔가 보답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러기 위해서 강해져야 한다고... 그래서 열심히 노력해서 두 왕관의 세자비까지 됐는데, 넌.... 넌!"

그라데이션 분노.

"넌 날 한 번 만날 생각도 안 하고! 오죽하면 찾다 찾다 무투회라도 열면 상금 노리고 얼굴 내비치지 않을까 싶을 때까지 사람 기다리게나 하고!"

"아니! 아니 아니, 생각은 했어. 바빠서 그랬지..."

"... 흥."

샐쭉해진 마리안을 달래려던 가나가,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 마리안."

"... 몰라. 말 걸지마."

"아니, 말고! 이 계집애야. 저 소리 안 들려?"

웅성거리는 소리는 앞에서 들려왔다. 말끔하던 숲길도, 어느새 말발굽과 마차 바큇자국까지 섞여 엉망진창으로 뭉개져 있었다. 둘은 서둘러 말을 몰아 저승의 문을 지키는 수호자들의 부락 앞에 당도했다.

부락에는 낯선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하얀 로브를 입은 수호자들이 입구에서 사람들을 체크하다가, 마리안을 알아보고 반색했다.

"어? 마리안? 아니지. 이젠 세자비 마마시겠군요. 무슨 일이십니까?"

"오랜만이네요. 저 사람들은 누구죠?"

"아... 그건, 수호자 알란나 님께 직접 들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자리를 내 드릴 테니 잠시 기다리시죠."

수호자는 마리안과 가나를 빈 테이블로 인도했다. 그 외에도 몇 개의 테이블이 있었는데 모두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마차를 끌고 온 마부나 화살을 다듬는 사람, 바쁘게 약을 조합 중인 치유사들도 있었다. 가나가 주변을 유심히 둘러보더니 한 깃발에 새겨진 문양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려진 달이다."

"아... 저들이?"

"그래. 파괴신에게 대항하기 위한 지원 조직이지. 수호자 알란나님의 이명이기도 하고."

파괴신의 군대는 저승과 원대륙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소수지만, 대륙의 여기저기에서 언데드의 형상으로 출몰하고 있었다. 그 실체를 아는 이들이 대항하기 위해 결성한 범 국가적 조직 - 그것이 가려진 달이었다.

"보통은 현상금만 내걸지, 이렇게 직접 모이는 건 드문 일인데..."

"알고 온 게 아닐까? 저승의 일."

가나가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수호자들을 대동한 한 여인이 다가왔다. 그녀의 긴 머리와 눈썹은 새벽이슬처럼 하얀 빛이었지만 주름 하나 없는 얼굴은 나이를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마리안과 가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알란나 님."

수호자 알란나는 손짓으로 둘을 앉히고 자신도 그 앞에 앉았다. 다른 수호자들은 흩어져 자기 볼일을 보러 가는 듯했고, 두 어 명만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을 뿐이었다.

알란나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구나, 마리안. 그리고 가나. 혹 오지 않을까 생각은 했지만."

"네. 저승에... 변고가 생겼나요?"

"... 맞아. 그런데 어떻게 알았지?"

마리안은 자신의 꿈과 저승을 상처 입히지 않고 들어갈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알란나는 차분히 듣고 있었지만 얼굴에 드리운 수심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루키우스의 행방도 찾고 있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마리안은 궁금해 던 점 한 가지를 물었다.

"그런데 왜 지금 와서 파괴신의 군대에게 밀리기 시작한 거죠? 그동안 잘 버티기도 했고, 여기 가나 너츠가 태어날 때쯤에는 완전히 소강 상태였다면서요."

"...밤이 찾아왔으니까."

"밤이요?"

"그래. 원래 저승에는 밤이라는 게 없었단다. 가을 새벽녘처럼 끝없는 안개와 빛에 뒤덮인 세계였지."

그녀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저승은 새벽안개로 뒤덮인 세계였다. 숫자와 힘에서 압도적이었던 파괴신의 군대였지만 그 안갯속에서는 부대 간의 연계도 되지 않았고 나가는 출구조차 찾을 수 없었다. 반대로 그들을 막는 저승 방어군은 누이 여신의 축복을 받아 새벽안개를 꿰뚫어 볼 수 있었기에, 그 점을 이용하여 효과적으로 적들을 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뀌었어. 언젠가부터 새벽안개가 걷히고 저세상의 달빛이 비치면서 밤이 시작 된 거야. 네가 - 가나 너츠가 바라기 마을에 맡겨진 것도 그때였지."

"저요?"

가나가 반문했다.

"제가 양부님에게 맡겨진 건 꼬꼬마 시절인데요. 그럼 알면서 십 년도 넘게 방치했다고요, 이 사태를?"

"아니, 그건 아니야. 저승의 시간은 이승과 다르게 흐른단다. 기본적으로는 매우 느리지. 때문에 저승에서 싸우는 이들에게는 너무 짧은 기간이었던 거야. 벌어지는 일들을 다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그 시간의 흐름마저 밤과 함께 점차 현세와 비슷해져 가고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르겠구나."

"..."

복잡한 이야기에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 가나 너츠를 대신해 마리안이 말을 이었다.

"저희가 저승을 상처 입히지 않고 들어갈 방법이 있을까요? 저승 방어군 분들이나 알란나 님은 종종 저승을 오가시잖아요.”

알란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여전히 눈을 굴리던 가나를 가리켜 보였다.

“저승과 연이 깊은 자.”

“?”

“가나 너츠. 저승의 아이인 너는 그 연이 깊은 편이지. 그런데 그 연이 그 사이에 더욱 깊어도 졌더구나.”

흠칫하는 가나.

“그동안 전이석... 저승의 돌을 얼마나 쓴 거지?”

“아아... 그게...”

알란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조곤조곤 질책을 늘어놓았다.

“전에 말해주지 않았니? 저승의 돌은 편리한 동시에 위험한 물건이야. 사용자를 점점 더 저승의 존재에 가깝게 만들지. 너무 많이 사용하면 육체가 뒤틀리거나 현세와 저승의 틈 어딘가에 고립될 수도 있단다. 특히 저승의 아이인 네게는 그 부작용이 더 잘 일어날 거고. 네 부모도 그걸 걱정해서 네가 큰일에 휘말리지 않도록 멧돼지와 나무열매(너츠) 뒹구는 호젓한 바라기 마을에 맡겼던 건데...”

“아 좀! 잔소리가 심하다구요!”

가나는 몸을 쭉 뻗으며 질색했다.

“그보다!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요?”

“너는 문이 되어야 한단다.”

“문이요?”

“그래, 문. 누이 여신께서는 자신의 몸이나 다름없는 저승에 길을 내어 사람들을 구하셨지. 마찬가지로 저승의 아이이면서도 산 자들의 세계에서 살아온 너는, 저승을 방문하려는 산 자들의 문이 되어야 해. 나 역시 저승과 연이 깊은 하얀 숲에서 태어난, 열두 누이 신관의 한 사람이기에 어느 정도는 가능하고. 하지만 내가 데리고 갈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십수 명이야. 그러니 저승과 연이 깊으면서도 이승에 오래 머물렀던... 그런 다른 사람이 문으로서 필요해. 그리고 그런 사람은...”

“... 저란 말이죠?”

알란나가 고개를 깊이 떨어트렸다.

“... 굉장히 힘든 일이란다. 여신께서는 그 여파로 돌아가셨지. 나 역시 겪기 전에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그런 고통이었어. 말 그대로 영혼이 몸과 분리될듯한...”

주변의 잡음 속에서 한동안 이어지는 세 사람의 침묵.

이윽고 마리안이 말했다.

“... 방법을 좀 더 찾아볼게요. 아, 그리고 엘프들도 돕겠다는데. 괜찮을까요?”

“엘프? 그들을 만난 거니? 좋은 생각인지 모르겠구나. 사실 예전에도 찾아온 적이 있었지.”

“그땐 뭐라고 했는데요?”

“저승의 문을 닫는 봉인을 해제해서 저승으로 쳐들어 가겠다 더구나.”

가나와 마리안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뭐 그런 미친...”

“우리는 말렸지만, 결국 밀어붙였지. 봉인이 약해지자 그들이 들어서기도 전에 파괴신의 군대가 튀어나오면서 아수라장이 됐어. 우린 힘을 합쳐서 봉인을 복구했고, 그들의 인솔자였던 의원이 사과를 하더구나.”

“그 의원 이름이 혹시 ...벨리온?”

“맞아.”

가나는 혀를 찼다.

“그 아저씨 진짜 유난하네. 괜찮을까, 마리안? 또 사고 치는 거 아냐?”

“두고 봐야지. 그리고 엘프들의 힘을 빌리려면 필수야. 그만한 마법사를 찾기도 힘들고.”

“굳이 엘프들의 힘을 빌려야 돼? 너 세자비잖아. 두 왕관 정규군이나 너희 가문 병사들을 굴리면...”

마리안은 쓴 웃음을 지었다.

“왕가에서도 알고는 있어. 원대륙에 진출했을 때 이미 파괴신의 군대와 마주쳤고. 지금도 종종 싸우고 있지. 다만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정보를 통제하길 원해. 그래서 정규군을 함부로 못 굴리는 거야. 우리 가문 병사들도 마찬가지고.”

“아... 그래서 엘프를?”

“맞아. 그들은 애초에 두 왕관 소속이 아니고, 두 왕관의 영지를 통과하지 않고도 하얀 숲까지 병력을 움직일 수 있지. 그러니 정보 통제에서도 자유로울테고. 그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알란나를 돌아보며 마리안은 손뼉을 쳤다.

“보급이나 수송, 그 외에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씀하세요! 노르예트의 선단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으니까요.”

“그건 고맙구나. 그럼... 일단은 한 달 치 식량과 구급약과 깨끗한 리넨, 그 후에는 갑옷과 무기를 부탁해도 될까? 대략 여기 모인 사람들의 두 배 정도 분량이 필요한데.”

“아, 네. 잠시만요.”

마리안은 옆에 내려놓은 여행용 가방에서 수첩과 깃 펜을 꺼내 적기 시작했다.

“한 달 치 식량과 구급약과 깨끗한 리넨. 그 후에는 갑옷과 무기... 여기 모인 사람들의... 음음. 이 정도 맞죠?”

그녀가 들이미는 수첩에 고개를 끄덕이는 알란나를 보면서 가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 습관, 뭔가 바로 적는 건 여전하구나?”

“중요한 이야기는 남겨야지. 나중에 무슨 일 생길 줄 알고.”

“그건 맞는데. 그냥 매번 돈 떼 먹힐까 봐 계약서 쓰는 사람 같아서? 흠... 그럼 난...”

검지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건드리며 장난스런 표정을 짓는 가나.

“네가 그 물자랑 다른 방법 찾는 동안, 난 여기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 문인가 뭔가 되려면 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거죠, 알란나 님?”

“...되어 주겠다는 거니? 문이?”

불안한 얼굴로 반문하는 알란나에게 가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마리안 쟤랑 같이 돌아가려면 저승의 돌을 써야 하는데, 제 몸에는 그거 위험하다면서요? 어르신 걱정되셔서 밤잠도 못 주무실 텐데 걱정 하나는 덜어드려야죠. 그리고 몰랐으면 모를까, 연세 드신 분이 혼자 낑낑거리면서 고생하고 계시다는 데 젊은 것이 알고도 그냥 지나치면 쓰겠어요? 사람, 아무리 젊어 보여도 나이는 못 속인다니까요. 그러니까 올해로 연세가 대략....”

“... 그 이상 말하면 혼난다?”

“늬예. 늬예.”

은근슬쩍 알란나를 놀려먹는 가나를 보면서 마리안은 미소 지었다.

가나는 언제나 그런 사람이었다.



* * *



한 편.

하슬라의 왕세자 이산과 엘테르는 이니스 섬에 도착했다. 바라기 마을에서 동편으로 배를 건너 있는 그 섬은 숲과 바위가 한 덩이로 뒤엉켜 안갯속에 가라앉은 듯한 곳이었다. 풀숲 사이로 난 좁은 길을 헤치며 나아가던 왕세자는 옷깃에 묻은 이슬을 털어내다가 문득 그리운 표정을 지었다.

“고향의 비취 계곡만큼이나 습기가 많군... 몸 그렇게 털지 마라, 테미캣. 경망스럽다.”

앞서가던 엘테르는 물벼락 맞은 강아지처럼 몸을 부르르 털다 대꾸했다.

“남이사. 그나저나 누이 여신 신도들의 총 본산이 왜 여기인 거야? 하얀 숲이 더 저승에 가깝다면서?”

“신앙이 꼭 탄생지에서만 융성하란 법은 없으니까. 사서에 의하면 이 근방의 초승달 왕좌는 서대륙 최초의 누이안 왕국이었고, 최초인 만큼 누이 여신에 대한 믿음도 강했겠지. 조금만 유추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헤에... 금수저 생각보다 똑똑하네. 그냥 그 머리 굴려서 나라 다스리면 되는 거 아냐? 왜 굳이 저승까지 가서 조상의 지혜를 빌리겠다는 건데?”

주변을 둘러보며 따라오던 왕세자의 얼굴이 굳었다.

“난... 경험이 부족해.”

“어머, '경험'이라니. 페레인 나한테 그런 거 말해도 무리...”

“그 경험 말고, 이 테미캣아! 그날 이야기했잖아!”

“꺄악, '그날'이라니! 너 점점...“

너스레를 떠는 엘테르 때문에 말을 잇지 못하던 왕세자가, 이윽고 분한 듯 뇌까렸다.

“... 잔을 나눌 때 말했잖아. 난 개구리가 되어서, 원대륙의 한 우물에 몇 년이나 갇혀 있었다고.”

하슬라의 왕세자 실종 사건. 권력을 노리던 왕가의 외척들은 총명하고 무예가 뛰어난 어린 왕세자를 경계했다. 왕세자를 처리하기 위한 방법으로 독살이 고려되었지만, 그들의 중심인 왕의 장인은 그 정도로 독한 인물은 되지 못했다. 대신 왕의 장인은 개구리로 변하는 저주가 담긴 약을 왕세자가 즐겨 마시던 차에 탄 다음, 개구리로 변한 왕세자를 원대륙의 한 우물에 던져버렸다. 그 우물을 지나치던 한 모험가에게 구해지기 전까지 왕세자는 그렇게 괴로운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떠오르는 기억 때문에 생각에 잠긴 왕세자에게, 엘테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했어.”

“...뭐?”

엘테르는 팔목에 묻은 이슬을 낼름낼름 핥다가 다시 말했다.

“잘했다고. '검은 것'에게 먹히지 않고 잘 견뎠다고. 내가 이 말 한 건 기억 안 나? 하긴 취했으니까.”

“'검은 것'이 뭔데.”

“검은 것이 검은 것이지 뭐야. 아무것도 못 하고,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가만히 있으면 꿈틀거리면서 여기와 여기에 고이고 썩어가는 검은 것.”

왕세자 이산의 가슴과 머리를 가리켜 보이며 엘테르는 말을 이었다.

“다른 언어로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는 모양인데, 우린 그냥 검은 것이라고 불러. 별로 거기에 대해 말할 기회가 없거든. 우린 항상 뭔가 하면서 돌아다니니까 고일 틈도 없고. 하지만 쌓이면 사람이 변하고, 정상적으로는 살 수 없게 되는데 넌 용케 그것에 먹히지 않았네? 남이 주는 술도 물도 덥석덥석 잘 받아 마시고. 그래서...”

얼굴을 바싹 들이미는 엘테르 때문에 이산은 멈춰 섰다.

“잘했다는 거야. 그러니 가슴 좀 펴. 뭣하면 경험 많은 이 누님을 의지하던가?”

“... 경망스럽다, 테미캣.”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리는 이산.

“그놈의 경망.”

홱 뒤돌아 꼬리를 살랑거리며 걸어가는 엘테르.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고 발걸음을 뗀 왕세자의 귀에, 속삭이는 듯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 전부는 아냐...”

“뭐라고?”

“아니. 혼잣말이야. 가자.”

엘테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풀에 덮여 있던 길이 점차 인적이 남은 길로 바뀌면서 가파른 언덕 곳곳의 집들이 보였다. 도중에 만난 신관복 차림의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올라가자, 높은 절벽을 등지고 청동과 황동으로 주조된 거대한 여신상이 그들을 맞이했다. 여신상의 두 팔은 품으로 달려오는 아이를 맞이하듯 넓게 벌려져 있었고 입가에는 고통스러우면서도 상냥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슬픔을 참는 듯 감긴 두 눈 밑에는 이슬이 모여 눈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엘테르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크다... 저게 다 금속이야? 돈 깨나 썼겠는데... 야, 너 뭐해?”

그녀는 갑자기 큰 절을 올리는 이산 때문에 깜짝 놀랐다. 왕세자는 감격에 가득 찬 얼굴로 두 번 절을 올린 다음 고개를 숙여 목례를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분이... 조상들의 조상, 어머니들의 어머니, 저승의 주인이시자 인류를 위해 희생하신 위대한 누이 여신이신가!”

“아니, 맞는데. 근데 왜 절하고 난리야.... 어, 야? 잠깐, 잠깐!”

엘테르는 기겁하면서, 재차 절을 올리려고 폼을 잡는 왕세자의 덜미를 잡아챘다.

“이 우물 안 개구리가?! 관광 왔어? 촌티 내지 마! 얕보인다고! 아 진짜 왜 저승 가려고 하는지 아주 자알~ 알겠다. 그만해!”

그대로 황홀한 얼굴을 하고 있는 왕세자를 질질 끌고, 엘테르는 사람들이 일러준 신관들의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 앞에는 이미 몇몇 신관들이 모여 이쪽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는 도중에 만난 신관 중 하나가 앞질러 가서 이쪽의 도착을 알렸으리라.

“어서 오십시오.”

그중 가장 연로해 보이는 자가 가슴에 손을 얹고 허리를 숙이는 정중한 예를 표했다.

“누이 여신의 대신관 중 하나인 '5월의 그왈흐'라 합니다. 두 왕관의 세자비께서 보내신 분들 맞으십니까?”

엘테르는 옆에서 포권지례를 취하다가 황급히 인사법을 바꾸는 이산을 보며 한숨을 내쉰 다음 마찬가지의 예법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엘테르와 이산이라고 합니다. 여기 소개장이 있어요.”

소개장을 건네받은 대신관은 내용을 읽어 내려가다가 멈칫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을 물린 다음 '함께 가시지요'라고 작게 속삭이며 돌아섰다. 그렇게 둘은 숙소 한쪽의 작은 별실로 안내되었다.

“... 그렇군요. 루키우스님을 찾으신다는 말입니까.”

별실의 테이블 앞에서 손수 두 사람의 의자를 빼 주려는 대신관을, 이산이 허둥지둥 만류했다.

“아, 넵. 자리는 소인들이 알아서 하겠으니 심려치 마십시오, 어르신. 그보다 루키우스 님을 뵐 수 있는 겁니까?”

대신관은 고개를 저었다.

“알 수 없습니다. 이곳에 자주 들르거나 머무르시는 건 맞습니다만, 그 '자주'란 것도 다른 곳과 비교해 그렇다는 것일 뿐. 년 단위를 넘어서 수십, 기록에 의하면 수백 년 만에 들르시기도 했다고 하니까요. 그래도 요 몇 년 간은 저희들에게만 정체를 밝히신 채 여신의 제례를 지켜보기도 하시는 등 자주 오시는 편입니다만...”

실망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엘테르와 이산에게 대신관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다만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련히 알아서 갈까. 기다려!'라고.”

“네?”

“뭐야, 그게! 이쪽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다는 거잖아? 그런데 기다리라니 무슨 헛소리야?”

발끈해서 벌떡 일어서는 엘테르를 막아서며, 이산이 대신 물었다.

“죄송합니다. 동행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럼 언제 떠나셨는지,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라도 알 수 있겠습니까?”

“장소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저 뭔가 알아볼 것이 있어 한 달 정도 자리를 비울 것 같다 시더군요. 그동안 치유사나 솜씨 좋은 궁수들을 선발해 하얀 숲으로 보내 놓으라 고도 덧붙이셨습니다. 그게 2주 정도 전 아침의 일인데, 그날 저녁에 하얀 숲의 전령이 도착했지요. 저승이 위협에 처했다고...”

“아...”

붉으락푸르락하던 엘테르는 부끄러워졌는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자리에 앉았다.

“그... 뭐. 최소한의 조처는 취했다는 거네. 그런데 그럼 루키우스는 우리가 올 걸 알고 있었다는 소리야?”

“정확히 두 분을 예상하신 건 아닌 듯합니다. 그저 '온다면... 노르예트의 그 말괄량이일 수도 있겠군.' 이라고 하셔서...”

“흥!.....흐흥.”

콧바람을 거세게 부는 것을 보니, 엘테르는 '노르예트의 그 말괄량이'라는 대목에서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고 있는 듯했다. 울다가 웃으면 털 난다던데 페레들은 얼마나 웃었길래 털투성이인 거지 같은 생각을 하던 이산에게, 대신관이 물어보았다.

“그런데... 두 분은 어떤 연유이십니까? 루키우스님께서도 설마 먼 동방의 왕세자와 페레가 세자비를 대신해 오실 거라 고는 예측하지 못하셨던 듯 하니, 이 늙은이도 궁금해지는군요.”

“아, 소인은...”

이산은 저승에서 선조를 만나 지혜를 구하고자 한다는 이야기를 건넸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던 대신관은 엘테르에게도 같은 질문을 돌렸지만, 엘테르는 팽 하고 고개를 틀었다.

“여자의 비밀을 알아서 뭐 하게.”

“허허. 실례했군요.”

사람 좋은 웃음을 터트린 대신관은 그대로 한동안 엘테르의 표정을 지켜보더니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괜찮습니다만, 적당히 털어놓을 사람 만나시길. 안 그러면 빨리 삭습니다. 이 늙은이처럼 말이죠. 허허.”

“뭐...”

다시 얼굴을 붉히는 엘테르를 막아서느라 진땀을 빼는 이산.

대신관은 모른체했다.

“루키우스님이 돌아오시는 대로 두 분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그 외에 궁금하거나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아, 네. 송구합니다. 그런데 저승은... 어떤 곳입니까?”

이산에게서 나온 질문이 뜻밖이었는지 대신관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곧 가게 되실지도 모르는 곳인데, 어째서 궁금해 하십니까?”

“저희 속담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위태롭지 않다' 말이 있습니다. 그동안은 일이 급박하고 알아보아야 할 다른 화두가 있어 미뤘습니다만. 돌아가는 배편을 기다리는 동안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 여쭙니다.”

“그렇군요. 어찌 설명해야 할까...”

두 손가락을 깍지 끼고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대신관은 운을 뗐다.

“이 늙은이도 저승에 가 본 적은 없습니다. 그건 하얀 숲의 수호자들과 그들의 필두인 알란나님의 역할이지요. 다만 기록과 배움을 통해 알고 있는 건 – 지금의 저승은 수천 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곳이요?”

“저승은 누이 여신의 신체와도 같은 곳입니다. 그 신체를 갈라 낸 상처를 따라 우리의 조상은 이 땅으로 흘러 들어왔죠. 자, 상처가 오래되면 어떻게 됩니까?”

“곪거나... 딱지가 앉거나...”

“그렇습니다. 이물이 들어가 곪는 것이나 출혈을 막기 위해 딱지가 앉는 것이 상처이죠. 지금의 저승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기존의 상처 입은 저승과 현세와의 경계에 딱지 같은 곳이 생겼고, 이물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파괴신의 군대나, 저승을 지키시는 조상님들도요. 오로지 생에 대한 집착을 벗어던진 영혼들만이 그 사이를 건너 진정한 저승의 저편으로 갈 수 있다고 하죠. 조상님들은 그 경계 위에 요새를 세우시고, 여신의 성역이라 부르신다 합니다. 한편 여신을 대신하여 죽은 자들을 그 너머로 보내는 일도 맡고 있고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산이 되물었다.

“그렇다면... 그 여신의 성역이라 불리는 요새가 파괴신의 군대의 표적이 되겠군요?”

“어찌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선조들께서 저승의 상처를 따라 이승으로 나오셨다면, 파괴신의 군대도 딱지 뒤의 저승에 상처를 내어 이승으로 나올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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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총 2번 편집 되었으며, 1명이 편집에 참여하였습니다.

최종편집자 : 아키위키 @누이 | 1레벨 | 격투의 초심자 | 누이안 (2022-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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