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저승의 밤 서장6: 원정 전날의 T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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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저승의 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서장 제 6장. 원정 전날의 TMI

“... 라던데, 맞아?”

며칠 후.

일행은 다시 황금 혀 항구에 모였다.

“우리가 들은 거랑 같아요. 가나는 이 자리에 없지만...”

엘테르의 질문에 수긍한 마리안은 한쪽에서 서류철을 넘기고 있는 소녀를 불렀다.

“그건 그렇고, 융에 양? 연구 성과를 보고해 주시겠어요? 저승에 상처를 입히지 않고 들어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큼큼. 아! 아~!”

그사이 폭싹 늙어버린 드워프 소녀 - 미카엘라 융에는 갈라져서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헛기침을 한 다음 침을 꼴딱 삼켰다. 연구에 뛰어든 두 사람 중, 테이블 한쪽 구석에서 우아하게 차를 마실 정도로 컨디션에 여유를 보이는 벨리온과 달리 그녀는 기절 직전.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런 미카엘라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이들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한쪽 구석에 요리사가 서 있었다. 그 덩치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미카엘라 정도는 쏙 들어갈 만한 거대한 방패를 짚은 채로. 미카엘라는 핏발 선 눈으로 발표를 시작했다.

“먼저 이 보고서를 작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신 그위오니드의 의원 벨리온 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요. 발표하는 동안 술잔, 의자, 책상은 던지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출구는 왼쪽에 있으니 만에 하나의 폭발 사고 시 꼭 이용해 주시고요. 각자 챙겨오신 '훌륭한 대화 수단'들도 잊지 말고 꼭 갖고 돌아가 주세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일동 침묵.

미카엘라가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엘테르는 마리안에게 속삭였다.

“... 드워프들, 평소 회합에서 뭘 하는 거지?”

“... 저도 몰라요.”

“... 임은 자명합니다. 거기 정숙해 주세요.”

왜 인지는 몰라도 미카엘라의 오른손에 꽉 쥐어져 있는 스패너. 엘테르는 저도 모르게 차렷 자세가 되었다.

보고서 낭독은 지루하게 이어져 조는 사람이 나올 즈음에야 끝이 났다.

“... 여하의 자세한 논증을 생략하고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저승의 돌을 핵으로 증명된 몇 가지 공간 과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마법의 힘을 덧씌우면 이공간에의 영향을 최소화하거나 반대로 시전자의 부하를 줄이는 방식의 전이술 보조는 가능해요. 간단한 실험도 해 봤고요. 말씀해 주신 대로 세자비 님의 친구 분이 저승과의 공간 친화성이 높다면 각종 기능성과 안정성의 확보는 쉬워지겠지만, 현세에서의 이론만 바탕으로 하기엔 역시 정보가 부족하네요. 한 번쯤 저승에서 직접 관찰하고 검증할 필요가 있어요.”

“저승에요? 미카엘라 양이 직접?”

힘겹게 고개를 끄덕인 미카엘라는 서류철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더니 요리사와 눈을 마주쳤다.

“그럼 이만 보고를 마치고...”

요리사가 저벅 저벅 걸어와 방패를 건네자, 그녀는 온몸으로 받아 세우더니 그 뒤로 쏙 숨어버렸다. 그러고는 앵앵댔다.

“질문이나 찬, 반론. 논파 환영합니다. 포크나 접시, 신발까지는 허용할게요.”

“...”

흡족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벨리온 외에는 모두 반응이 없었다. 사실 그를 제외하고 제대로 알아들은 사람도 없었으리라. 아니 그보다 대체 왜 보고서 발표 후에 포크나 접시나 신발에 대한 허용이 필요한 지가 궁금할 지경이었다.

“저, 소저?”

그중에서도 진작에 졸아버려 가장 산뜻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산이 손을 번쩍 들었다.

“네. 거기 왕자님.”

“어... 왕자 아니고 왕세자입니다. 저승은 위험하다는데, 혹 가고 싶은 다른 연유라도 있습니까?”

방패... 아니, 미카엘라가 말했다.

“아빠 만나려고요.”

“아 그런...”

이산은 당황해서 우물쭈물하다가 사과했다.

“춘부장께서 그런... 죄송합니다!”

“아뇨. 죄송 안 하셔도 돼요. 멋대로 집 나가서 십 년도 넘게 행방불명 된 주제에 '받아볼 즘엔 난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 따위 진부한 편지를 보내 울 엄마 펑펑 울린 사람. 한 방 시원하게 갈겨 주고 싶은 거니까요. 저승의 저편 따위에 아직 안 갔으면, 직접 보내줘도 좋고요.”

그 스패너로? 아니면 방패로? 어느 쪽이든 죽은 사람 두 번 죽일 것 같은 기운이 방패 뒤에서 스멀스멀 새어 나오더니 '더 질문 없으신가요?'라는 말을 끝으로 잠잠해졌다.

잠시 후 스르르 쓰러지는 방패.

“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엘테르였지만, 제일 먼저 달려간 것은 요리사였다. 다른 이들도 놀라서 다가가 보니 미카엘라는 잠들어 있었다. 요리사의 거대한 두 손안에 담겨, 작은 새처럼 새근새근. 안도의 한숨을 몰아쉰 엘테르는 마리안에게 핀잔을 주었다.

“세자비, 너무했어. 애한테 뭘 시킨 거야?”

“아니... 아니에요. 서둘러 달라고, 보수를 잘 챙겨 주겠다 고는 했지만 무리해서 하라고 까지는...”

“철야는 그녀의 뜻이다.”

벨리온은 그렇게 말하며 소녀의 엉킨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연구실 문을 노크하자 화를 내더군. 자기 짐을 막 다루는 사람의 말 따윈 듣고 싶지 않으니 내버려 두라고.”

“...”

'자기 짐을 막 다루는 사람'께서 침묵을 지키시자 벨리온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들여보내줬다. 그리곤 어마어마한 기세로 연구에 몰두하더군. 잠도 제대로 자지 않았다. 식사마저 마다하길래, 몇 번 권했지만 물과 사탕 몇 개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 틀림없이 절박한 거겠지, 그녀의 염원은. 방금 내뱉은 말의 무게 이상으로.”

소녀를 2층으로 들고 올라가는 요리사의 뒷모습을 보면서 벨리온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여하튼 상황을 정리해 보지. 루키우스는 이 일을 이미 알고 있었고, 원인을 찾으러 간 듯하다. 그리고 손에 닿는 이들을 먼저 햐얀 숲에 보냈지. 그 하얀 숲의 수호자들은 우리 군대의 파병을 허용했다. 그리들 말했었나?”

“네.”

“그렇다면 받아들여질 걸세. 현왕 에노이르의 의중도 그러하리라 생각하네만, 혹 반대하시더라도 원로원은 참전을 원하겠지. 에오카드를 비롯한 최정예 병력을 하얀 숲으로 보내겠네. 군량을 비롯한 물자도 충분히 함께 할 테니 그대는 이미 수호자들에게 약속한 보급만 부담하면 되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문... 문의 역할을 하는 것은 가나 너츠라는 여성이란 말이지. 그 문이 되는 방법을 수호자들로부터 배우고 있는 중이고?”

“네.”

“문의 역할이 초래한다는 고통에 대한 대비책은, 내 생각도 저 소녀와 같다. 이론은 한계가 분명하고 이제는 경험하는 수밖에.”

벨리온은 그렇게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간추려 낸 다음, 테이블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모두의 목적을 다시 한번 확인하지. 마리안 노르예트.”

마리안은 오른손을 가볍게 들어 올려 보였다.

“네.”

“그대는 저승의 조상들이 위기에 처하심을 보았고, 그를 구하고자 한다. 하슬라의 왕세자 이산”

테이블 위에 풀어둔 이산의 쌍검 위로, 그의 두 손이 언제나처럼 포권지례를 취했다.

“예.”

“그대는 저승의 선조로부터 지혜를 구하여, 쇠락한 나라를 올바로 다스리고자 한다. 엘테르.”

식탁 한쪽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엘테르가 두 손을 들어보였다.

“나 참. 꼭 이렇게 일일이 확인해야 돼? 저승에서 잠깐 확인해 볼 게 있어. 나쁜 짓도 아닐 거고 민폐도 끼치지 않을 거야. 나 활도 곧잘 쏘니까 걸리적거리지도 않을 거라구. 됐어, 꼰대 할아범?”

“... 군율과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흥.”

콧방귀를 뀌는 엘테르를 뒤로하고 벨리온의 말이 이어졌다.

“안델프의 미카엘라 융에는 방금 자신의 부친을 만나고 싶다 한 것을 모두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는 아란제브를 찾아 길을 묻고자 한다. 병력의 수와 질로 판단 하건대 원정군의 주력은 우리가 될 듯하군. 그리고 내게는 군무의 경험도 있으니 기본적인 지휘를 맡도록 하지. 오해를 막자면 이것은 내가 최고 의사 결정권자라는 뜻이 아니다. 각자의 목적을 달성하기 적합하다 생각되는 시점이 오면 말하도록. 이 원정은 그대들의 도움으로 성사된 만큼 모든 상황에서 최대한의 배려를 약속하겠다. 결국 우리 모두는 가나 너츠 - 그 여인을 문으로 삼아 저승을 오가게 될 테니. 또한 저승의 시간이 상대적으로 느리다 하였으니 모든 것은 속전속결이어야 한다. 돌아왔더니 세상이 변했더라는, 선왕과 같은 일은 겪고 싶지 않군.”

마리안과 이산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 눈꼴시었는지 엘테르가 비아냥댔다.

“장군님 나셨네. 취임턱 같은 거 안 내?”

“취임턱이 뭐지?”

“그것도 몰라? 자리에 올랐을 때 모두에게 식사를 대접 하는 거야.”

“그렇군. 그럼 그 취임턱이란 것을 내도록 하지. 뭐가 먹고 싶은가? 나는 '만년 스튜(perpetual stew)'.”

모두의 눈이 탁자 위의 메뉴판에 꽂혔다.

그건 가장 저렴한 음식이었다.



* * *



나방 한 마리가 밤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창가의 등불에 날아들었다가, 요리사의 거대한 손아귀에 담겨 창밖으로 포르르 날아갔다. 마리안은 웃음을 터트렸다.

“또에요? 그냥 문을 닫아 두지 그래요.”

요리사는 말이 없었다.

침대에 머리에 몸을 기댄 마리안은 두 손을 깍지 껴 크게 앞으로 기지개를 켰다. 그녀의 한쪽에는 잘 닦인 갑옷과 손질된 검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여행용 가방에는 수첩과 여행식과 상비약이 들어 있었다. 아침에 빨아 널은 잠옷에서는 햇살의 향기가 났고, 침대 시트는 주름 하나 없이 깨끗했다.

홀에서 왕세자의 외침이 계단참을 타고 들려왔다. 엘테르가 재미 삼아 시비를 걸고 있는 모양이었다. 창 밖에서는 문이 삐걱이더니 또각또각 지팡이 소리가 멀어지는 걸 보아 벨리온이 자기 숙소로 돌아가는 듯 했다. 엘프들에게 연락을 취하겠다더니, 서둘러야겠지. 그 와중에 옆 방에 잠들어 있는 미카엘라의 코 고는 소리는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모든 게...”

“...?”

“모든 게 너무 잘 돌아가는 것 같아서 무서워요. 뭐, 원정 전날 저녁 메뉴가 스튜뿐이었다는 건 좀 아쉽지만. 아, 요리사님의 스튜가 맛없다는 게 아니에요. 그냥... 눈치 보지 말고 다들 기념할 만한 뭔가를 먹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벨리온님은 명색이 원로원 의원이신데, 엘테르가 무례하게 굴었던 게 싫었던 걸까요?”

요리사는 행주로 손을 닦고, 책상 위의 먼지를 치웠다.

“변덕이었어요.”

부끄러운 듯 고백하는 마리안.

“이 주점에서 머물기로 한 거 말이에요. 가문의 저택이 있지만 밤이 되니 갑갑해서 못 견디겠더라고요. 가나 생각도 나고. 같이 했던 여행 생각도 나서 항구 길을 따라 걸었거든요. 그러다 주점이 보이니까 생각이 더 나서. 그래서 하룻밤 변덕을 부렸던 건데, 좋더라고요. 야식도 맛있고. 요리사 님도 친절하시고. 뭐, 항상 말은 없으시지만 말이에요.”

“...”

“무사히 돌아오게 되면, 여기에서 또 모두와 함께 저녁을 먹고 싶어요. 그리고 지금 같은 소란을 들으면서 잠들고 싶네요. 그러고 보니 미카엘라 양이 요리사님에게서 스튜를 배우고 있댔죠? 저희가 책임지고 잘 데려 올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또...”

“... 세자비.”

마리안은 고개를 들었다.

요리사의 거구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가 손을 내밀자 마리안은 저도 모르게 몸을 젖혔다. 요리사는 그 손 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아챈 걸까, 그녀의 불안을.

지난 여행의 끝에서 그녀는 살해당했다. 그렇기에 더 이상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물론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님을 확인 한 것은 위안이었다. 하지만 죽음의 순간에 느낀 그 공포, 그 절망감. 사랑하고 있던 줄도 깨닫지 못하던 세계와 단절되고, 손을 내밀어도 멀어져만 가던 경험은 그녀를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이제부터 가려고 하는 곳은 그런 세계였다.

과연 이번엔 괜찮을까. 또다시 내 곁의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것은 아닐까. 그런 복잡한 생각들이 평소의 그녀보다 더 많은 말을 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그런 불안을, 이 말 없는 요리사는 알아챈 것이 아닐까.

그 요리사는 일어서서 말했다.

저승의 꿈에서 깨어난 세자비에게.

“...부탁이 있네.”

-저승의 밤 서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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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자 : 아키위키 @누이 | 1레벨 | 격투의 초심자 | 누이안 (2022-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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