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트라 대 여제' 8화. | 신대륙의 인물들

2014-04-16 10:43 | 조회 6513


 

파비트라가 건재하다는 소식은 다할을 새 황제로 세우려 하던 자들에게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파비트라가 반역자들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쪽으로 이야기를 만들어왔기 때문에 죽지 않은 파비트라가 복위하는 것을 막을 명분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파비트라가 돌아오기를 손 놓고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목숨이 걸린 문제였으니까.

 

파비트라가 사라졌던 몇 달 동안 이샤마가 황위에 올랐지만 실질적 지배자는 섭정 다할이었다. 이샤마는 비록 소년이었지만 자신을 고립시키고 다할을 황제로 만들고 싶어 하던 자들이 누구인지 모를 나이는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황도 밖으로 탈출했겠는가? 앞으로 파비트라가 황도로 돌아와 이샤마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안다면 다할에게 붙은 자들을 살려 두겠는가?

 

차라리 처음부터 다할이 황제가 되었더라면 여제가 죽은 줄 알고 그랬다고 변명이라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밀어낸 존재는 파비트라가 목숨처럼 아끼는 황태자였다. 이샤마에게 등을 돌렸던 자들은 파비트라에게 용서받기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랬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여제의 복위를 막아야 했다.

 

마침 막 다할을 황제 자리에 앉히려던 참이었으니 이제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다할 지지파는 비파 항구를 차지한 자들이 정말로 파비트라를 모시는 자들인지도 확인되지 않았고 참칭일 가능성도 있으니 확인부터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황위를 비워둘 수는 없으니 일단 다할을 황제로 모시고 군대를 파견해 선황제를 찾으러 가자고 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주장이었지만 그들이 다수였기에 결국 다할은 막무가내로 황위에 올랐다. 이번엔 다할도 사양이 어쩌고 하는 소리는 꺼내지도 않았다.

 

즉위식은 생략되었지만 일단 한 번 보관을 쓰고 나면 내려가지 않을 명분을 만들기가 훨씬 쉽기 마련이었다. 파비트라 여제의 복위를 기대하던 자들은 이대로는 곧 피의 숙청이 따를 것임을 직감했다. 다할 파의 선황제 논리에 동조해서라도 하루빨리 사신을 파견해 파비트라를 황도로 돌아오게 해야 했다.

물론 다할 파는 하루하루 핑계를 대며 사신 파견을 미루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다할 황제는 재빨리 첫 인사를 단행했는데 정식 임명장을 만들기 위해 황제의 인장을 넣어둔 함을 열어보니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누가 인장을 가져갔을까? 이샤마일 수도, 파비트라일 수도 있었다. 이샤마는 황제로 재위하는 동안 한 번도 인장을 사용한 일이 없었다. 그럴 만한 중대한 결정을 내린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는 섭정이었던 다할도 인장에 접근할 수 없었다.

 

다할 황제는 몹시 화가 났지만 이제 인장을 돌려받기 위해서라도 파비트라와 이샤마를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원로원 회의가 열렸지만 비파 항구로 보내는 것이 사신단인지 조사단인지 영접단인지를 놓고도 한바탕 논란이 벌어졌다. 이름에 따라 파견될 책임자의 격도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때 메레디스가 나서더니 어장(御葬)을 맡았던 책임자로서 자신이 직접 파비트라를 모셔오겠다고 자원했다.

 

전임 재상이었던 메레디스가 간다면 사실상 비파 항구에 황제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과 같았다. 원로원이 망설이자 메레디스는 살아 있는 황제의 장례를 버젓이 치른 죄인인 자신은 한시라도 빨리 파비트라를 만나 청죄하고 싶으니 제발 자신을 보내어달라고 했다. 하필 그가 어장 책임자였던지라 그의 논리를 꺾을 방법이 없었다.

메레디스가 가게 되자 자연히 그의 격에 맞는 규모 있는 영접단이 구성되었다. 다할 황제는 어쩔 수 없이 메레디스를 떠나보냈지만, 동시에 탑의 도시로 밀사를 급파했다. 황제의 밀서를 받는 사람은 대역 죄인으로 수배된 자, 카타니아 황녀였다.

 

오래 전, 다할과 카타니아는 공통의 목표를 위해 손을 잡았다. 다할은 황위를 원했다. 반면 카타니아는 이미 대역죄인으로 낙인찍힌 몸이라 황제가 될 순 없었다. 카타니아가 원하는 것은 복수였다. 자신과 아말 황자를 배신한 이스밀, 그리고 파비트라에 대한.

 

카타니아는 아말 황자가 죽은 후 홀로 도망쳐 많은 고생을 했다. 그러면서 이스밀에게 자신과 아말이 얼마나 안이하고 어리석어 보였을지를 실감했다. 그때까지 그녀는 이스밀에게 복수심을 품기보다는 스스로의 무능함을 자학했다.

그러나 파비트라가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생각이 바뀌었다. 이스밀이 한심한 자신들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파비트라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계획적으로 접근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분노로 눈이 뒤집히자 반역을 제안하며 먼저 이스밀을 찾아간 쪽이 자신이었음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카타니아는 자학의 시절을 보내는 동안 멀리서 이스밀이 하는 것을 관찰하며 배운 것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제국의 적이 누구일지를 생각해 보았다. 제국은 자연발생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늦게 합병된 제국의 말단일수록 독립하고자 하는 욕구가 컸다.

그 중 교역권 문제로 과중한 세금을 짊어지고 있는 오스테라의 불만이 가장 크다고 판단했다. 또한 오스테라는 제국의 상비군만한 군대를 용병으로 부릴 정도로 부유했다.

 

카타니아는 오스테라의 유력자들에게 접근해 오스테라의 힘으로 새 황제를 만들어내면 독립도 꿈은 아니라고 부추겼다. 수 년 간의 황위 다툼으로 황족 대부분이 죽어나간 터라 새 황제 후보는 몇 명 없었다. 그 중에서도 다할이 가장 유력했지만, 사실 다할과 카타니아는 원수 간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할의 아버지인 누로날 황제를 죽게 한 장본인이 바로 카타니아와 아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카타니아는 내심 어려우려니 생각하면서도 다할에게 누로날 황제를 죽인 사람은 이스밀이라고 둘러대며 접근을 시도해 보았는데 의외로 손쉽게 먹혀들었다. 다할은 황제가 되고 싶은 생각으로 몸이 달아 상대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죽은 지 오래된 아버지쯤은 안중에도 없었다.

 

카타니아는 다할과 오스테라 사이에 협상을 주선했다. 오스테라 측은 노련하게도 파비트라 여제의 암살 계획에는 관여하지 않고 황위가 비었을 때 다할을 지원하겠다고 암시했다. 그러려니 암살을 맡을 새로운 세력이 필요해졌다. 오스테라 인들은 은근히 비파 항구도 독립을 바라고 있더라는 정보를 흘렸다. 이리하여 바르토크의 배역이 정해졌다.

 

오스테라는 자진해서 제국의 일원이 된 후 오랫동안 황도의 중신들에게 뇌물을 주어 왔다. 오스테라의 돈에 의지해 온 자들은 때가 되자 일제히 다할에게 기울어졌다. 또한 오스테라는 다할이 황제가 되어 권리를 줄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 재빨리 탑의 도시를 차지했다. 이대로라면 다할이 황제로서 자리를 잡은 후에는 오스테라의 독립뿐 아니라 탑의 도시에 대한 권리마저도 요구할 가능성이 높았다.

다시 말해 사실상 파비트라를 없애고 제국을 와해시키려 한 주인공은 다할이나 카타니아라기보다는 그들을 적절히 조종하고 이용한 오스테라 인들이었다.

 

다할이 보낸 밀서는 탑의 도시에 머물고 있는 카타니아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다. 밀사는 탑의 도시 근방의 통행로를 은밀히 지키고 있던 수상한 병사들에게 붙잡혔다. 밀서의 중요성을 알아본 병사는 데비 강 상류의 산속에 진을 친 본진으로 달려가 사령관에게 밀서를 전했다.

사령관 나디르는 다할의 밀서를 펼쳐 보더니 웃었다.

 

“밀사는 최소한 셋이렷다. 좋다. 너희가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주마.

 

며칠 후 나디르는 전군에 출진 명령을 하달했다. 나디르의 군대의 정체는 오스테라가 쳐들어올 때 탑의 도시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던 수비군, 자색 수련 문양을 옷에 달고 있어 일명 ‘연의군’으로 불리는 군대였다. 그들의 중추는 오래 전에 이스밀과 나디르가 아므르타에서 함께 키웠던 정예병이었다.

 

나디르가 이끄는 연의군은 산에서 내려와 탑의 도시 근처에 이르러 오스테라군의 움직임을 살폈다. 탑의 도시에서 나온 대 군대가 북쪽으로 진군하는 것을 보고는 소규모 부대를 보내어 뒤를 밟게 했다. 본진은 이틀 정도 거리를 두고 뒤를 따랐다.

오스테라군은 비파 항구 근처에 이르러 군대를 감춘 채 파비트라에게 사신을 보냈다. 내용은 이샤마 황제가 선황제인 어머니를 맞이하러 직접 왔으니 항구 밖으로 친히 맞이하러 나오라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파비트라는 이샤마가 황도를 떠나 모습을 감췄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아들이 직접 왔다는 소식을 들은 파비트라는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류이진은 편지를 읽자마자 코웃음을 쳤다. 어머니가 살아 있다는 소식에 이샤마 황제가 직접 달려오는 일이야 벌어질 수도 있겠지만 저것을 진짜 황제의 행차로 보기에는 준비기간이 터무니없이 짧다는 것이었다.

 

저들이 무엇 때문에 서두르는지 모르지만 뭔가 기한 내에 파비트라를 속여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심지어 비파 항구 밖으로 나오라고 하지 않는가?

류이진은 물론 파비트라는 이샤마 황제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면서, 비파 항구에서 성대한 영접을 준비할 테니 환영단을 따라 항구로 들어오시라고 답장을 썼다.

 

그러자 현재는 이샤마가 황제이므로 파비트라가 직접 맞이하러 나와야 한다는 논리의 편지가 다시 날아들었다. 이제는 파비트라도 확신했다. 진짜로 이샤마라면 이런 신경전은 상상도 하지 않을 것이다.

류이진은 ‘별 수 없군요’라면서 파비트라가 밖으로 행차할 준비를 갖추게 했다. 그리고 시녀 한 사람을 파비트라로 분장시켜 수레에 태웠다. 그리고 파비트라에게 말했다.

 

“오늘, 반역자들이 태양 아래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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