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트라 대 여제' 10화. | 신대륙의 인물들

2014-05-14 08:25 | 조회 6740

 




현재 가장 큰 군대를 거느린 사람이 나디르였으므로 나디르의 의견을 무시하기란 쉽지 않았다. 나디르가 파비트라를 주군으로 삼겠다고 맹세하긴 했지만 파비트라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이스밀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서라고 보는 편이 옳았다.

물론 파비트라가 명령을 내린다면 따르긴 할 것이다. 그러나 연의군은 이스밀과 나디르가 직접 키운 군대였으므로 나디르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고, 이스밀을 죽게 한 비파 항구에 대한 적개심도 나디르와 똑같았다. 파비트라가 그들의 뜻을 따라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파비트라가 이스밀을 생각하는 마음이 자기들만 못하다고 생각하고 불만을 품을 것이었다.

 

그러나 파비트라는 결국 나디르의 주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스밀 공의 죽음은 짐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죄인은 처벌되었고, 참회하고 있는 비파 항구의 백성들은 제국의 자식이다. 어버이인 황제는 자식을 꾸짖을지언정 버리지는 않는다. 짐은 언젠가 비파 항구를 떠나 황도로 돌아가겠지만 앞으로도 여전히 비파 항구는 제국의 자식일 것이다.

 

파비트라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나디르와 연의군의 불만을 완전히 잠재울 수는 없었다. 연의군과 비파 항구 사람들 사이에는 날마다 크고 작은 충돌이 일어났다. 나디르는 그런 충돌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형국이었다. 점차 양측 모두에 불만이 쌓여갔다. 류이진은 중재해봤자 통하지 않을 것을 알고 쓴웃음을 지으며 파비트라에게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류이진은 무언가 기다리는 소식이 있는 듯했다. 그 소식이 날아들자 모든 충돌은 잊혀버렸다.

 

탑의 도시가 탈환되었다. 파비트라도 나디르도 아닌, 고작 천여 명의 영접단을 거느린 메레디스의 힘으로.

메레디스는 파비트라가 있는 비파 항구로 오기 위해 황도를 출발했지만 가던 도중 탑의 도시가 얼마 전 오스테라 군의 출진으로 텅 비다시피 했음을 알게 되었다. 하늘이 내린 절호의 기회였다. 메레디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탑의 도시로 접근했다.

 

탑의 도시 사람들에게 오스테라 군은 이방인이자 정복자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 외부의 군사적 도움만 있다면 얼마든지 쫓아내고 싶은 존재였다. 그렇다 할지라도 천 명으로 함락할 만큼 만만한 도시는 아니었다.

메레디스는 먼저 황제의 사절단을 영접하라고 요구한 후, 자신이 거느린 영접단이 선발대에 불과함을 암시하며 지금이야말로 제국의 품으로 돌아올 기회임을 시사했다. 오랫동안 서부에서 첫손가락에 꼽혀 온 도시의 자부심도 슬며시 자극했다.

하늘이 도왔는지 그 무렵 비파 항구의 전투 소식이 전해져 왔다. 탑의 도시 사람들은 메레디스의 도움을 받아 재빨리 남은 오스테라 인들을 내쫓았다. 그리고 탑의 도시는 파비트라 여제가 다스리는 땅임을 선언했다.

 

그 소식은 두 사람을 화나게 했다. 첫 번째는 가장 최근에 대관식을 한 자신이 엄연히 현 황제라고 믿어 온 다할이었다. 물론 탑의 도시가 파비트라를 지지한 것은 다할을 반대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워낙 거리가 멀다보니 황도의 사정을 세세히 몰랐기 때문에, 다할은 사라진 파비트라 대신 잠시 섭정 황제 역할을 맡은 것뿐이라는 메레디스의 설명을 그대로 믿었을 뿐이었다. 다할이 소식을 듣게 된 것은 다소 후일이었지만 그는 메레디스를 사절단 대표로 삼은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두 번째는 다름 아닌 나디르였다. 물정 모르는 사람들은 탑의 도시 함락 소식에 나디르가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반대였다. 나디르는 격노했다.

이스밀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림자 속에 숨은 적들의 정체를 분명히 알기 위해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고향을 적들에게 넘겨주고 나온 나디르였다. 그 후 나디르는 오스테라와 카타니아 황녀가 배후에 있음을 알아냈고, 다시 탑의 도시를 탈환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려 왔다. 파비트라의 구출과 탑의 도시의 탈환, 이 두 가지를 해내야만 이스밀의 영전에서 면목이 선다고 생각했다.

 

비파 항구에서 오스테라 군을 섬멸하고 파비트라를 만났으니 이제 거의 이룬 것이나 다름없게 된 염원이었는데, 그것을 엉뚱한 자가 가로채어 갔다. 공들여 농사 지어 놓았더니 지나가던 나그네가 과실만 따 간 형국이었다. 나디르는 분통이 터져 더러운 항구 놈들은 한 명도 믿을 자가 없다고 욕설을 퍼부었다. 메레디스는 하필 비파 항구 출신이기도 했다.

 

반면 류이진은 메레디스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 상황 또한 어느 정도 예상했던 듯했다. 그렇다면 막을 수도 있었으련만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는 나디르가 소원대로 직접 탑의 도시까지 되찾아 기고만장해지면 한층 다루기 어려워진다고 판단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사나운 나디르의 화살을 교묘하게 피하는 효과도 있었다. 그간 나디르는 류이진에게 심사가 꼬여 곧잘 대놓고 면박을 주었고, 류이진의 방침을 어기고 소란을 피우는 부하들도 일부러 내버려두곤 했다. 그러나 메레디스가 나타나 화살 받이가 되어 주자 류이진은 나디르에게서 깨끗이 잊혔다.

 

나디르의 심사가 어찌됐든 이제 두 도시에 거점을 갖게 된 파비트라는 양쪽의 힘을 합쳐 황도를 공략할지, 아니면 여세를 몰아 반역 도시 오스테라를 정벌할지 정해야 할 시점이었다. 양쪽 목표에는 장단점이 있었다.

류이진이 정리한 바로는 황도로 돌아가기를 택한다면 다할을 폐위시켜 전 제국의 황제라는 지위를 되찾고 이샤마와도 재회하는 장점이 있는 반면(이때까지도 이들은 이샤마가 황도를 탈출했음을 모르고 있었다), 그 사이에 힘을 가다듬은 오스테라를 아주 오래 상대해야 할 위험이 있었다. 또한 황도 공략에 전력을 다하는 사이에 오스테라가 비파 항구나 탑의 도시를 도로 공략할 위험성도 컸다.

 

반면 오스테라를 먼저 정벌한다면 최근의 패전으로 당황한 오스테라를 간단히 쓸어버리고 복수와 명분을 동시에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의외로 반격이 거셀 가능성이 있고 그 사이 다할에게 황도를 빼앗겨 지방 제국의 주인으로 밀려날 위험을 배제할 수 없었다.

 

파비트라는 심사숙고한 끝에 황도로 돌아갈 것을 결정했다. 대신 탑의 도시에는 메레디스를, 비파 항구에는 류이진을 남겨두기로 했다. 황도 공략을 앞두고 파비트라의 오른팔이자 책략의 핵심인 류이진을 남기고 가는 것은 위험성이 큰 결정이었지만, 한때 반역을 저질렀던 도시로서 아직도 민심이 아슬아슬한 비파 항구를 지킬 적임자는 이스밀과 함께 비파 항구를 다스려본 류이진뿐이었다.

 

파비트라는 나디르의 연의군과 마적단 출신들을 중심으로 기동력 있는 부대를 꾸려 황도로 진격했다. 도정 중 크고 작은 도시들에서 충성 맹세를 받았기 때문에 여제가 직접 이끄는 정예군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제국 각지로 퍼졌다.

연의군은 이스밀이 죽은 지금 나디르에게 절대 충성하고 있었지만 장교와 고참병들 중에는 어린 시절부터 파비트라를 봐온 자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여제다운 위엄으로 군대를 이끄는 파비트라의 모습은 신선한 경이로움이었다. 이스밀이 지극히 사랑해서 마침내 황제로 세웠던 소녀, 그 소녀가 자라 죽음을 겁내지 않고 늘 선봉에 서는 모습은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이때의 파비트라는 이스밀과 약속한 대로 이샤마에게 제국을 물려주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달리고 있었다. 이샤마가 황제가 되어야만 이스밀이 한 희생에 의미가 생겨나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은 잘 알지 못했지만 파비트라에게 죽음이란 즉 이스밀과의 재회를 의미했다. 때로 말동무할 류이진조차 없이 홀로 막사에 앉아 있을 때면 그 편이 더 나은 선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이스밀에게 배운 것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황제에게 제국은 권리가 아니라 숙제이다. 그 숙제를 해내지 못한 황제는 죽을 권리도 없다.

언젠가 파비트라는 그것을 이샤마에게 가르쳐야 했다. 그러기 전에는 이스밀을 만나러 갈 자격 또한 없었다.

 

긴 행군 끝에 황도가 가까워왔다. 쉽지 않은 행군이었다. 무엇보다 물자 조달이 쉽지 않았다. 제국은 적지가 아니었기에 약탈을 할 수도 없었다. 충성 서약을 받은 도시들에서 물자를 지원받으며 오긴 했지만 민심이 나빠지는 것을 감수해야 했기에 최소한도로 줄일 수밖에 없었다. 그걸 신경 쓰며 군단을 보살피느라 파비트라도 나디르도 훌쩍 말랐을 정도였다.

 

예상대로 황도 근처에서 습격 부대와 마주쳤다. 나디르는 예전에 이스밀과 함께 오랫동안 황도 공략을 연구했기에 어디에 군대를 숨기기가 좋고 기습하기에 좋은 위치는 어디인지 훤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연의군을 몇 갈래로 나누어 예상 지역이 가까워오면 주머니 끈을 조이듯 양쪽에서 접근해 쉽사리 적을 섬멸했다.

 

황도의 성벽 아래 다다른 파비트라는 진을 치고 황제가 돌아왔으니 다할이 직접 나와 영접하라고 명령했다. 다할은 파비트라의 귀환을 얼마든지 환영하지만 현 황제는 자신이니 황도로 들어와 배알하라고 맞받았다.

파비트라는 다시 자신이 정한 황태자는 이샤마였지 다할이 아니었으므로 다할이 파비트라의 정통성을 부인하지 않는 이상 다할의 황위는 적법하지 않다고 못 박았다. 다할은 이샤마가 자신에게 직접 양위했으니 적법하다고 주장했다.

 

“그게 사실인지는 이샤마 황태자에게 직접 들으면 될 일이다. 황태자를 나오게 하라.

 

바로 답하지 않던 다할은 며칠 후, 본색을 드러내어 군대를 물리지 않는다면 이샤마의 얼굴을 다시 볼 일은 없을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건 곧 자신에게 적법하게 양위한 선황제를 시해하겠다는 주장이었으므로 더 이상의 정통성 논의는 쓸데없는 짓이었다.

어찌됐든 이샤마의 이름이 거론된 이상 파비트라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나디르가 조언했다.

 

“송구하오나 폐하, 다할 놈은 벌써 황태자 전하를 시해했을 것입니다. 살아 있다면 일찌감치 성벽 위로 모셔서 어머니인 폐하의 마음을 어지럽히려 했을 텐데 그러지 못하지 않습니까? 저들의 주장을 귀담아들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파비트라는 그 말을 선뜻 믿을 수 없었다. 이샤마와 이샤마에게 물려줄 제국을 위해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이미 죽었으리라고 믿으란 말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파비트라는 마음 속에 굳게 믿는 구석이 있었다.

파비트라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다할은 이샤마가 친필로 썼다는 호소문을 보내왔다. 억류되어 힘든 생활을 하고 있으니 살려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그걸 끝까지 읽자마자 내던져버린 파비트라는 벌떡 일어나 전군에게 공격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나디르가 놀랐을 정도였다. 나디르는 진지 밖으로 뛰어나가는 파비트라를 뒤따라가며 어째서 생각이 바뀌었느냐고 물어보았다.

 

“이샤마의 편지 어디에도 알키미의 이름이 없었다. 그럴 리 없지. 짐이 떠나오며 황태자 곁에 불사신을 남겨두었거늘. 알키미는 이샤마를 홀로 남겨두고는 죽지도 않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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