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트라 대 여제' 11화. | 신대륙의 인물들

2014-06-03 09:24 | 조회 6966





오늘날, 제국의 황도는 사라져버린 제국의 이름을 따 ‘하리하랄라야의 폐허’로 불리지만 당대에는 ‘하라니온’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숲과 미래의 신 ‘누하라’, 통칭 하라 신의 이름에서 유래한 ‘신의 도시’였다. 사막과 과거의 신 ‘누하리’, 통칭 하리 여신의 이름과 합해지면 대륙의 이름인 ‘하리하라’가 된다.

 

황도 하라니온은 밀림을 베어내고 세운 계획 도시였다. 입지가 좋아 자연스럽게 사람이 모여들고 발달한 오스테라, 탑의 도시, 비파 항구 등과는 조건이 전혀 달랐다. 하라니온이 세워지기 전, 제국의 수도는 탑의 도시였다.

서쪽에서 시작되었던 제국이 점차 동쪽으로 뻗어나가면서 탑의 도시는 지나치게 서쪽에 치우친 입지가 되어갔다. 동방의 하슬라와 베로에가 제국의 손아귀에 들어오고 나자 카만 1세는 새로운 황도를 짓겠다고 선언했다.

 

새 황도는 제국의 중심부에 위치하면서 페레를 비롯한 이민족들로부터 안전해야 했다. 또한 제국의 위용에 맞게 광대한 터를 갖춰야 했다.

하라니온이 들어선 자리는 그런 조건을 갖추긴 했지만 지나치게 깊은 숲속에 있어서 도시를 세우기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이 선정된 것은 카만 1세가 새로 얻은 하슬라 지역을 마음에 들어 해서 그쪽과 가까운 입지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하라니온은 카만 1세의 치세에 완성되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황제가 셋이나 바뀌고서야 겨우 도시다운 면모를 갖춰서 황제 일가가 머물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카만 1세의 구상이 워낙 야심차서 닦은 터만 해도 다른 도시의 몇 배에 달했는데 그 대부분이 전인미답의 밀림을 베어내고 만든 것이었다. 그 위에 로칼로카 산맥에서 운반해 온 자재로 제국에 어울리는 궁전과 시가지를 지어나갔다.

황제가 바뀔 때마다 뭔가 한두 가지씩은 바뀌었고, 갑자기 계획에 없던 저수지가 생겨나거나 했으므로 도시의 완성은 무한한 세월이 걸릴 기세였다.

 

결국 파비트라의 치세에도 하라니온은 완성된 도시가 아니었다. 당대 제국의 어느 도시보다도 거대했지만 도시 한쪽에서는 여전히 언제 완성될지 모를 탑을 쌓고 있었다.

쉬지 않고 외지에서 운반되어 오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석재와 목재 때문에 황도를 감싼 성벽 한쪽에는 따로 문이 마련되어 있었다. 도시가 완성되고 나면 자연히 없앨 문이었고 위치도 여러 차례 바뀌었기에 정식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으나 그런 식으로 이미 수백 년이었다. 그렇다 보니 어느새 일꾼들이 붙인 ‘망치의 문’이라는 이름이 통칭이 되어버렸다.

 

밤낮으로 열려 있던 망치의 문은 파비트라가 군대를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폐쇄되었다. 그러나 파비트라는 잘 알고 있었다. 그 문이 어떤 곳인지를. 황도는 파비트라의 고향이었다.

어린 시절, 샤미르 3세의 총애를 받던 어린 황녀 파비트라는 황도의 어디라도 제멋대로 드나들었다. 어린 파비트라는 모험심이 강하고 장난기가 넘쳐서 일부러 호위병들을 따돌리고 숨어버리는 것을 즐겼다. 목이 날아갈 것을 두려워하며 황녀를 찾아 헤매는 호위병들을 위해 해가 지기 전에는 반드시 돌아와 주었기에, 점차 호위병들도 체념하고 황녀가 알아서 돌아오도록 기다리곤 했다.

 

어린 파비트라는 매번 새로운 장소에 가보겠다는 계획을 세워 황도 이곳저곳을 탐험했다. 그러던 중 망치의 문 위에 있는 좁은 공간에 몸을 숨기고 있으면 재미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음을 알아챘다. 다른 문으로는 들여올 수 없는 규모가 큰 자재들, 그것을 옮기기 위해 동원된 기묘한 기계와 수레들, 거친 일꾼들, 이국풍의 거래상들, 은밀히 들여오는 금지 물품과 지저분한 거래, 금지된 교단의 신관들, 도망자와 좀도둑과 창녀와 쥐떼, 그 모두가 망치의 문 아래를 지나갔다. 그들은 경비병의 묵인 하에, 또는 경비병의 눈을 속이며 망치의 문을 드나드는 시범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파비트라가 황도를 공략할 계획을 설명하자 나디르는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나디르가 보기에 파비트라는 황제일지 몰라도 지략가는 아니었다. 특히 전쟁은 여자가 잘 해낼 만한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러나 파비트라의 뜻은 단호했다. 자신의 지략이 최선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전쟁으로 황도의 시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단지 동정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파비트라에게 이곳은 적국이 아니었다. 그녀가 앞으로도 다스릴 제국의 수도였다.

황도의 성문 하나도 부수고 나면 다시 만들기 위해 세금과 부역을 동원해야 했다. 고작 성문도 그러한데 이민족도 아닌 황제 때문에 집이 부서지고 가족을 잃어버린 백성들의 마음을 되사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인가? 그런 일은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는 편이 현명했다.

 

“알겠습니다, 폐하.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비록 파비트라의 뜻에 동의했지만 나디르가 파비트라처럼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파비트라의 계략을 따르지 않는다면 택할 방법이 정면대결뿐이었고, 상대 군대가 제 발로 나와 전투에 응해 주지 않는 한 공성전은 기나긴 소모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원정군에게는 무한한 시간이나 자원이 주어지지 않는다. 나디르도 한때 황도를 공략해 본 사람으로서 황도의 견고함과 주어진 시한 사이에서 저울질을 해 본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파비트라는 나디르가 이끄는 본대가 주 성문 앞에 진영을 갖춰 이목을 끌게 했다. 자신은 해질녘까지 기다렸다가 변복한 채로 별동대를 이끌고 망치의 문 쪽으로 돌아갔다. 망치의 문은 육중한 나무로 만든 두 겹의 문으로 이뤄졌고 가까운 곳에 두 군데의 방어탑이 있었다.

별동대에는 파비트라가 데려온 마적들이 다수 섞여 있었다. 파비트라는 케사드에게 미리 두 방어탑의 사각 지점이 어디인지 일러두었다. 그리고 자신은 상자 하나와 아게우스를 비롯한 몇 명만 데리고 성문 북쪽의 숨겨진 구멍으로 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튼튼한 벽이지만 벽돌 몇 개만 빼내자 좁은 통로가 나타났다. 다섯 사람이 통로로 기어들어가자 성벽 안쪽의 계단이 나타났다. 물론 계단 위쪽은 보초가 지키고 있을 터였다.

 

그곳에서 파비트라는 상자를 열고 쥐들을 풀어놓았다. 쥐들이 어지러이 흩어지자 곧 성에 사는 쥐들이 뒤쫓아 나왔다. 쥐떼를 뒤쫓아 가니 지하에 위치한 식량 창고가 나타났다. 이 창고는 백여 년 전부터 경비병에게 뇌물을 주고 밀수품을 숨겼다가 들여가는 장소로 쓰여 왔다. 그래서 성벽 안쪽으로 안전하게 들어가는 토굴이 숨겨져 있음을 파비트라는 알고 있었다. 곡물 자루를 치워내자 온갖 밀수품이 쏟아졌고, 이윽고 토굴의 입구도 나타났다.

 

좁다란 토굴을 더듬어 따라가자 어느 하급관리의 집이 나왔다. 관리의 아내는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을 보고 흠칫했지만 상인 출신인 아게우스가 식량 창고에서 가져온 고급술과 파비트라의 장신구를 건네며 밀수품 상인인 체 하자 곧 평소처럼 그들을 내보내주었다.

밖으로 나오자 파비트라는 아게우스와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아게우스는 나머지를 이끌고 시내 어딘가로 모습을 감추었다.

 

혼자가 된 파비트라는 천천히 시내를 헤치고 나아갔다. 다할이 야간 통행을 금지하고 물자 징발을 명령한 데다 민심이 어수선했기에 거리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오랜만에 황도의 거리를 걸으면서 파비트라는 오래 전 이스밀이 황궁의 담을 넘어와 탈출하자며 손을 내밀던 때를 떠올렸다. 수 년 뒤 이스밀과 함께 황도로 돌아오던 날도 눈앞에 그려졌다. 이스밀이 비파 항구를 토벌하러 가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성문을 나서다가 뒤를 돌아보던 것도 생각났다. 그때 파비트라는 황궁의 탑에 올라가 떠나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황궁이 나타났지만 파비트라는 그곳으로 가지 않았다. 대신 황궁 벽을 천천히 돌아 시내 외곽에 있는 알키미의 집으로 갔다.

 

알키미의 집은 굳게 문이 닫혔고 불도 꺼져 있었다. 파비트라는 울타리를 한 바퀴 빙 돌며 표지를 찾았다. 있었다. 울타리 나무 하나가 쪼개진 틈에 무명 천 조각이 끼워져 있었다. 파비트라가 그걸 끄집어내는데 갑자기 울타리 안쪽의 문이 열렸다. 파비트라는 천 조각을 움켜쥔 채 재빨리 웅크렸다. 집에서 나온 그림자는 다가오는 대신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나이다.

 

알키미의 동생, 알아흐리의 목소리였다. 파비트라는 손에 쥔 천을 펴 보았다. 거기에 적힌 ‘안전’이라는 글자를 보자 눈앞이 흐려졌다. 파비트라는 곧 마음을 다잡고 일어나 알아흐리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알아흐리는 불을 켜지 않은 채 파비트라를 바닥에 앉게 했다.

 

“누추한 곳으로 모시게 되어 송구하옵니다, 폐하. 보셨다시피 태자 전하는 무사히 황도를 떠나셨나이다.

 

알아흐리는 바닥의 판자를 뜯고는 편지 두 통을 꺼내 보였다. 마지막 편지는 지난 달, 알키미와 이샤마가 매사냥 고원으로 들어간 직후에 쓴 것이었다. 알아흐리가 알키미와 이샤마가 어떻게 탈출했는지 설명하자 파비트라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알키미는 아직껏 짐을 실망시킨 적이 한 번도 없지.

 

파비트라가 편지를 챙겨 넣자 알아흐리가 말했다.

 

“폐하, 성문 밖에 나디르 장군과 연의군이 와 있다고 들었사옵니다. 황도에는 여전히 폐하를 따르고자 하는 자들이 많으나 폐하께서 돌아오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할이 그들 중 많은 자들을 죄목도 국문도 없이 옥에 가두었나이다. 또한 인장을 잃어버렸으므로 사실상 처분이 불가한데도 다할은 그들을 곧 처형할 작정이라 하옵니다. 며칠 전부터 다할은 황가의 재물을 제멋대로 꺼내 어딘가로 옮기고 있나이다. 이러한 연고로 표면적으로 다할을 따르는 자들도 마음속으로는 다할의 폭거에 분노하는 자가 많사옵니다.

 

“다할은 지금 황궁에 있는가?

 

“주궁을 비우고 다른 궁에 머물고 있다고 하나 정확히 어디인지는 소신도 알지 못하나이다. 폐하, 어서 성문을 부수고 진군하신다면 만백성이 기뻐 눈물을 흘릴 것이옵니다.

 

파비트라는 씩 웃었다.

 

“그건 고마운 얘기지만 짐은 성문이 얼마나 견고한지 잘 알고 있다. 공성기를 가져다가 두드려도 며칠 안에는 부서질 리 없는데 지금 우리에겐 공성기도 없어.

 

“허나 신은 우려하지 않나이다. 폐하께서 계획 없이 이 자리에 계실 리가 없음을 잘 알고 있나이다.

 

파비트라가 일어나며 빙그레 웃었다.

 

“그거 근사한 믿음이군. 짐의 계략도 그만큼 근사하게 들어맞는다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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