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트라 대 여제' 17화. | 신대륙의 인물들

2014-09-03 09:30 | 조회 12495








파비트라에게 두 가지 소식이 도착했다. 하나는 좋은 소식, 하나는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좋은 소식은 황태자 이샤마의 귀환이었다. 알키미와 함께 황도 근교에 도착했다는 전언을 들은 파비트라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아들을 보러 달려 나가고 싶었으나 황제의 처신으로는 걸맞지 않았기에 나디르를 보내는 것으로 겨우 타협했다.

나쁜 소식은 베난의 실종이었다. 실종이라고 보고된 이유는 탈출인지 납치인지 분명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유배지를 급습해 베난을 데려간 군대는 오스테라 측으로 보인다고 했다.

 

사실 그걸 나쁜 소식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것이 파비트라는 그들이 무엇을 하려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베난은 하리하랄라야의 황위에 다시 오를 수 없는 자였다. 또한 공식적으로 파비트라의 남편이었지만 인질의 가치조차 없었다. 파비트라도, 이샤마도 그에 대해 아무 애착이 없었다.

그나마 과거에는 그의 존재가 파비트라의 재혼을 막아주는 구실이었지만 이제 직접 다시 제국을 탈환한 파비트라에게 감히 혼인을 강권할 신하 따윈 없었다. 그리고 이스밀도 이미 곁에 없었다.

 

이튿날, 이샤마와 알키미는 드디어 황도에 도착해 파비트라와 재회했다. 황궁을 떠나 떠돌며 몰라보게 자란 아들을 본 파비트라는 목이 메었다. 놀랍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고, 그만큼 슬프기도 했다. 금세 돌아올 줄 알고 떠났던 길이 이렇게 꼬여 있을 줄은 몰랐다. 그 사이 이스밀은 떠나갔고, 아들의 얼굴은 부쩍 이스밀을 닮아가고 있었다.

 

이샤마도 어머니의 얼굴에서 세월의 흔적을 느꼈다.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아가씨 같던 어머니의 눈가며 입가에 어느새 주름이 자리 잡았다. 어머니가 그를 껴안고 눈물을 흘리자 그도 같이 눈물을 글썽였지만 솔직히 그는 기분이 어색했다. 어머니는 어느 모로 보나 손색없는 여제의 풍모였지만 자신은 황태자라는 자각이 그리 들지 않아서였다.

 

알키미는 파비트라가 믿었듯 과연 황태자를 지켜냈다. 파비트라는 알키미에게 높은 관직을 제안했지만 그가 오히려 거절했다. 그는 자신에게는 정무보다 황제와 황태자를 가까이에서 지키는 쪽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작위만 받아들인 채 여전히 두 사람의 호위 총관으로 머물게 되었다.

알키미가 받은 작위이슈바라’, 군주는 본래 하리하랄라야가 중앙집권적 제국이 되기 전, 새로 정복한 땅의 왕에게 내리던 칭호였다. 그리하여 알키미는 비록 명예 작위일지언정 남방 출신으로서는 유일한 군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샤마는 다시 황태자로 돌아왔다. 파비트라는 본래 오스테라 정벌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한동안 아들과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그것조차 미루게 했다. 여제는 이샤마의 기분에 세심하게 신경을 썼고, 함께 하는 자리를 자주 만들려 했다. 하지만 마무리되지 못한 국정 문제가 머리에 꽉 차 있었기에 이샤마와 마주 앉아 정담을 나누다 보면 이야기는 곧 제국을 다스리는 문제 쪽으로 흐르곤 했다.

파비트라는 너무나 힘들게 황제가 되었고 그걸 빼앗겼다가 다시 되찾기까지 했기에 늘 마음이 불안했다. 그래서 나이만 먹었다 뿐이지 제왕학을 배운 적도 없던 아들에게 자꾸 어려운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이샤마가 대답하지 못하거나 엉뚱한 답을 할 때면 파비트라는 점차 초조해졌다.

 

이샤마가 점차 어머니와 마주하기를 불편해할 무렵, 예상대로 페레 부족 연합체가 국경을 침범해오면서 이샤마는 자연스럽게 파비트라의 관심에서 놓여났다. 이미 류이진이 보낸 테미캣아윤을 통해 페레들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던 여제는 군대를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류이진의 정보에 따르면 페레들은 오스테라의 돈을 받고 움직이는 것이므로 전세가 불리해지면 오래 버티지 않고 달아날 것이었다. 이 기회에 직접 본때를 보여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 황도를 비우기에는 아직 불안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황태자가 돌아와 있지 않은가? 이스밀에 대한 충성심이 여전한 나디르라면 이샤마를 충심으로 보좌해 줄 것이다.

파비트라는 황태자 이샤마를 섭정으로 임명하고 나디르와 알키미에게 보좌를 당부한 뒤 직접 원정에 올랐다. 막 떠나려 할 때 알키미가 나와 아뢰었다.

 

“초원의 페레는 그림자 같습니다. 폐하, 그림자를 뒤쫓지 마십시오. 그들은 제멋대로 달리는 것 같지만 늘 같은 길로 되돌아옵니다. 초원은 생각보다 좁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떠날 때 각오한 대로 페레들과의 싸움은 속도전이었다. 초반에 정면으로 싸워 패퇴시키고 나자 페레들은 부족별로 흩어져 초원을 누비며 교란 작전을 폈다. 그들에게 이끌려 매사냥 고원 깊은 곳까지 들어간 파비트라는 어느새 페레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챘다. 이유가 뭘까? 모두 달아나서?

아니었다. 얼마간 더 나아가던 파비트라는 떼죽음당한 짐승들의 시체를 보았다. 그제야 알키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초원은 생각보다 좁다. 그 말은 초원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은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바로 군대를 돌렸지만 한 번 잘못된 길로 접어들고 나자 초원은 마치 올가미로 변한 듯했다. 몇날며칠을 달렸지만 샘 하나 찾아내지 못했다. 물과 식량이 떨어져 가자 모든 병사들의 신경이 극도로 곤두섰다.

그러던 중 척후병이 페레 군대가 동쪽으로 간 듯한 흔적을 발견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교전이 벌어진다면 백전백패였다. 모두 반대쪽으로 가야 한다고 모두 생각했지만 파비트라는 고개를 저었다.

 

“저들이 간 쪽으로 따라가라.”

 

파비트라는 군대를 여럿으로 나누어 간격을 두고 남북으로 일자진을 폈다. 그런 상태로 동쪽을 향해 전진하다가 무언가를 발견하면 바로 연기를 피워 알리도록 했다. 이틀 가량 갔을 때 남쪽 끄트머리 군대에서 연기가 솟아났다. 파비트라는 채찍을 후려치듯 일자진을 휘어 동쪽을 덮치도록 했다.

과연 페레 군대는 동쪽에서 왔고, 숫자가 적었기에 후방이 짧았다. 그들의 후방을 잡아채는 데 성공하자 포위된 페레들은 처음으로 도망치지 못한 채 패했다.

 

사로잡힌 페레들은 쉽사리 정보를 발설하지 않았다. 파비트라는 페레들은 여전히 황제의 신민이며 단지 오스테라에게 매수된 자를 벌하려는 것이라고 반복해서 설명했다. 통역을 통해야 해서 그런지 파비트라의 진심은 쉽게 전해지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비트라는 설득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들을 고문하지도 않았다.

하루가 지난 후, 한 전사가 처음으로 파비트라에게 입을 열었다.

 

“황태자와 검은 전사는 황제의 품으로 안전히 돌아갔소?

 

파비트라는 깜짝 놀라 그에게 여러 가지를 캐물었다. 그제야 상대가 흑곰 부족의 전사임을 알게 된 파비트라는 즉시 그를 풀어준 후 다른 포로들 중에서도 흑곰 부족은 모조리 풀어주게 했다. 그리고 예를 갖추며 내 아들을 구해준 은혜를 잊지 않았다고 했다.

상대는 황제가 이럴 줄은 몰랐던 듯 당황했지만 곧 말했다.

 

“황태자는 어머니를 닮고 검은 전사는 주인을 닮았음을 알겠소.”

 

자유의 몸이 된 흑곰 부족은 동족들을 버리고 저들끼리 떠나는 대신 남은 포로들과 한나절 동안 대화했다. 마침내 합의에 도달한 그들은 파비트라를 한 호숫가로 안내했다. 대 회합이 열렸던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자 지난 대 회합에서 대 마라로 뽑힌 바람길 부족의 자로갈 마라가 나타났다.

흑곰 부족의 중재로 자로갈 마라와 대화를 하게 된 파비트라는 오스테라와 손을 끊는다면 페레들의 자치권을 인정하겠다고 제안했다. 물론 페레들은 그 전에도 이미 자치를 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지만 황제가 직접 인정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로갈 마라는 한참 생각하더니 동족들의 의견을 모아보겠다고 약속했다.

 

파비트라는 조금 당황했지만 곧 그는 대 마라일 뿐 황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다. 부하들 일부는 그런 약속을 믿고 물러나야 하느냐고 의문을 품었지만 파비트라는 상대가 얼마든지 거짓말을 해도 되는 상황에서 신중하게 답했음을 믿고 군대를 돌이켜 황도로 돌아갔다.

자로갈 마라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때, 또다시 뜻밖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남방에서 갑자기 독립을 선언하며용의 후예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었다.

 

남방 지역은 용이 지옥으로 내려가는 길이라는 검은 사막을 비롯하여 혹독하게 더운 기후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인구는 적었고, 그나마도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사막을 오가는 대상들이어서 사실상 남방의 주민이라 할 수 없었다. 남방의 중심 도시인 아므르타도 서방 쪽으로 가면 중간 규모의 도시와 비슷한 정도였다.

그렇다 보니 제국의 지배도 상대적으로 느슨한 편이었다. 과거 이스밀이 군대를 키울 때 아므르타를 택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런 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만으로도 어처구니없는데 심지어 황제를 참칭한 자는 사라졌던 베난이었다. 오스테라가 배후에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지난번에 베난을 탈옥시켜 간 후로 조용히 있는가 싶더니 이런 일을 꾸미고 있을 줄은 몰랐다.

 

반란 세력의 규모는 알 수 없었다. 남방이니만큼 그리 대규모는 아니리라 짐작했지만, 진압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나마 살 만한 도시인 아므르타는 남방 중에서 최북단 도시였고, 그보다 남쪽으로 군대를 보내는 것은 보통 담력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흙이 물처럼 끓어오르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황도의 턱 아래 반란 세력을 두고 멀리 원정을 가는 것도 곤란한 일이었다. 경계로만 따지자면 남방은 황도와 꽤 가까운 편이었다.

 

생각할수록 난제였다. 진압하긴 어렵고, 진압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한때 황제였다가 대역죄인이 된 베난을 묵인해서야 제국의 권위가 서지 않거니와 혹 베난이 새로이 결혼해 자식이라도 얻는다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질 터였다.

파비트라는 오스테라 인들의 의도가 황제의 오스테라 원정을 막는 것이리라 짐작했다. 알면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어 화가 치밀었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오스테라에 꽤 머리 좋은 자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가서 진압하기는 어렵되 그렇다고 내버려둘 수도, 화친을 맺을 수도 없는 상대. 그런 상대를 황제에게 들이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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