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트라 대 여제' 19화 | 신대륙의 인물들

2014-10-08 09:32 | 조회 11647







남방 원정군이 아므르타에 입성했을 무렵, 탑의 도시를 지키는 메레디스가 보낸 사자가 황도에 당도했다. 사자가 파비트라에게 바친 편지에는 두 가지 보고서가 들어 있었다. 첫째는 그간 오스테라가 베난의 괴뢰국 ‘용의 후예’를 지원한 내역의 조사, 둘째는 최근 페레 부족들 사이에 벌어지는 권력 교체를 조사한 내용이었다.

 

메레디스는 오스테라와 맞닿은 최 변경의 땅을 지키며 크고 작은 충돌을 자주 겪어왔기에 누구보다도 오스테라를 잘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보고서는 상세할뿐더러 방대했다. 평소 느린 듯하지만 신중하고 꾸준한 메레디스의 성품 그대로였다. 메레디스는 과거 이스밀이 파비트라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한 일들을 꿰뚫어보는 명민함을 지녔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수 년 동안 오스테라를 관찰한 결과는 틀림없이 믿을 만할 텐데, 내용은 당혹스럽게 이를 데 없었다.

 

베난의 괴뢰국은 사막이 대부분이긴 해도 꽤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용의 길을 이루는 수십 군데의 오아시스 마을을 이미 병합했다. 오스테라의 지원을 통해 무장도 충분히 갖추었고, 동원 가능 군대는 적어도 2, 3만여 명에 달했다.

남방 원정군을 이끄는 알키미에게 3만의 군대를 주었는데, 그건 적군의 서너 배는 충분히 넘겠지 싶어 결정한 규모였다. 혹독한 날씨를 견디며 익숙하지 않은 황무지를 행군해서 정체 모를 적의 근거지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대가 엇비슷한 규모라니 이만저만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최근 베난의 행보는 꽤 영리해서 체계적으로 원주민의 환심을 살 계획을 실천하고 있는 데다 남방 특유의 용에 대한 신앙을 새롭게 고취시키고 있다고 했다.

뒤늦게 제국에 합류한 남방 지역은 본래 오랫동안 용을 숭배해 왔다. 남방인들은 용이 검은 사막을 헤엄쳐 건너 머나먼 남쪽에 있다는 지옥의 문까지 가고, 이윽고 지옥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남방 이슈바라로 돌아온다고 믿었다.

 

용이 지옥 바닥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동안 지옥에 빠진 자가 용의 비늘 한 개라도 가질 수 있으면 다시 지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여겨졌다. 또한 사막 어딘가에는 용의 뼈가 있는데 그것을 손에 넣으면 무한한 생명을 얻거나 모든 병을 고칠 수 있어서 누구나 갖고 싶어 하지만, 아직까지 용의 뼈를 얻어 사막을 빠져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이렇듯 전설이 아직도 위력을 발휘하는 땅에서 용에 대한 신앙을 새로운 나라에 덧입히는 것은 훌륭한 계략이었다. 과거 거만하기만 하던 베난이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갑자기 똑똑해지기라도 한 걸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베난뿐 아니라 오스테라의 참주 발니오마저도 최근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영리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발니오는 베난을 구조해 새 제국을 세워 파비트라를 교란한 것은 물론 누이아 대륙에서 들어오는 무역선의 기착지를 옮기는 방법으로 오스테라 주변의 작은 항구도시들을 실질적으로 오스테라 지배 하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북쪽 해안은 류이진이 봉쇄해버려서 큰 성과가 없었지만 남쪽 항구들은 누이안 거류지를 신설하는 등 오스테라의 계략대로 착착 움직여주고 있었다. 이런 식이라면 여차할 경우 오스테라가 누이안의 지원을 받아 제국에서 독립할지도 모르겠다는 추측마저 불러일으키는 행보였다.

 

그게 사실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상상을 하게 만든다는 것만으로도 제국을 충분히 압박할 수 있는 계책이었다. 이렇듯 갑자기 뛰어난 정책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 어디선가 새로운 참모가 영입된 것 같다는 심증이 강한데, 이상하게도 겉으로 드러나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페레의 동향도 심상치 않았다. 파비트라와 약속한 자로갈 마라는 신의를 지키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그와 관계없이 최근 자로갈 마라의 위상은 급격히 추락하고 있었다. 파비트라와의 전쟁에서 진 여파로 인한 몰락이었다. 새롭게 떠오른 반월 부족은 처음부터 파비트라 황제를 적으로 돌리고 제국과의 전쟁을 선언했다.

그 뒤에는 역시 오스테라의 조종이 있으리라는 것이 메레디스의 판단이었다. 정체 모를 오스테라의 책략가는 파비트라가 직접 원정에 나서서 해결한 문제를, 플레이어를 바꿔버리는 것으로 간단히 원점으로 되돌린 것이다. 부족들 사이의 세력 부침이 심한 페레들의 특성을 정확히 이용한 전략이 아닐 수 없었다.

 

메레디스의 제안은 다음과 같았다. 이대로라면 페레 정벌이 한 번 더 필요하며 적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지 전에, 즉 빠를수록 좋다. 다만 이번에는 황제가 나서기보다 탑의 도시에서 정벌군을 출진시킬 테니 황도에서 지원군을 보내 연합군을 형성하자는 것이었다.

그것까지는 파비트라도 올바른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황제가 두 번이나 정벌에 나설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고 오스테라를 등진 탑의 도시에서 대군을 파병하게 해서도 안 되었다.

그런데 이어진 진언이 파비트라를 혼란스럽게 했다. 메레디스는 지원군을 이샤마 황태자가 이끄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파비트라가 보는 이샤마는 여전히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였다. 하지만 이샤마는 이미 성인이었거니와 앞으로 황위를 물려받을 황태자로서 군대 경험을 쌓는 것도 필요한 일이었다. 메레디스 같은 현명한 노장과 함께 첫 전투를 치러보는 것도 나름 나쁘지 않은 구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비트라는 한참이나 망설였다. 과거 비파 항구를 정벌하도록 떠나보냈던 이스밀의 잔영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그날의 그 결정이 얼마나 많은 것을 바꿔놓았는지 몰랐다. 그 뒤로 기나긴 이별을 견딘 파비트라와 이스밀에게 허락되었던 것은 단 하룻밤의 재회뿐이었다. 이제는 전생인 듯 꿈인 듯 느껴질 정도로 옛 일이었지만, 그날 높은 탑에 올라 떠나던 이스밀을 바라보던 기억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때 나디르가 찾아와 마음이 약해진 파비트라를 설득했다. 이스밀은 나디르가 충심으로 따랐던 유일한 주군이자 완벽한 영웅이었고, 이샤마는 그런 이스밀의 아들이었다. 나디르는 주군의 아들이 호랑이처럼 자라기를 바랐지, 궁중에서 유약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아니, 실은 나디르가 보기에 이미 그런 상태였다. 그 무렵 이샤마는 황궁의 서고에 틀어박혀 옛 책을 읽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이샤마가 읽는 것은 원대륙 시절의 전설 및 기록들이어서 군주가 되는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몸을 단련하는 기색도 없었다.

 

황태자에게 제국을 다스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현실을 깨닫게 하자는 나디르의 말에 설득된 파비트라는 이샤마를 첫 원정에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느닷없는 명을 받은 이샤마는 몹시 당황했다. 참전 경험조차 없는데 전쟁 지휘라니 상상도 안 가는 일인 데다 무엇보다 이샤마는 페레들을 좋아했다. 과거 알키미와 함께 지내는 동안 페레들이 정착민보다 더 고결한 존재라는 인상마저 받았다. 그런데 원정의 목표가 바로 페레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샤마의 기분이 어떻든, 이샤마가 보아온 어머니는 감상적인 이유로 결정을 번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페레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는 이야기 따위는 별 소용이 없을 게 뻔했다.

사실, 파비트라도 마음속으로는 감상적일 때가 많았고, 특히 이번 결정이 어려웠던 이유야말로 감상적인 문제였지만 부모를 어려워하는 자식들이 흔히 그렇듯 이샤마는 어머니가 애써 감춘 연약함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간 이샤마는 또래보다는 스승들에게 둘러싸여 지내왔기에 서고는 그의 가장 좋은 친구였다. 과거 황도를 떠나기 전에도 그랬다. 그런 식이었으니 이샤마가 연마한 학문은 상당한 수준이어서 스승들과 대등하게 의견을 나눌 정도였다.

하지만 파비트라는 그런 점을 잘 알지 못했다. 이샤마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폭풍에 쫓기듯 내달리며 살아온 파비트라는 국정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학문의 가치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샤마도 그걸 알았기에 자신이 무엇에 열정을 느끼는지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이샤마를 중심으로 새롭게 페레 원정군을 짜면서 파비트라는 남방 원정군에도 추가 군대를 편성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양쪽으로 전쟁을 수행하려니 여유가 부족한 데다 지휘관으로 마땅한 적임자도 없었다. 급한 대로 연의군 출신의 노장 제르보가에게 병사 1만을 주어 보냈지만 파비트라는 줄곧 이대로라면 남방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리라는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 무렵, 오스테라에서는 메레디스가 알아보았듯 놀라운 전략들이 착착 진행되는 중이었다. 파비트라에게 남방 원정의 숙제를 안겨주고, 일단 해결했다고 생각한 페레 문제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작은 항구들을 하나씩 끌어들여 류이진을 압박하고, 누이안 거류지를 늘려서 이후 전쟁이 일어날 경우 누이안 군대의 참전을 유도하도록 준비해 놓았다.

모든 일은 잘 되어갔다. 참주 발니오는 만족한 나머지 이미 파비트라에게 승리한 것처럼 우쭐해졌다. 물론 그는 뛰어난 참모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실천할 정도의 영리함과 행동력은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현명함은 거기까지였다.

아르카디오는 그렇지 않았다.

 

발니오가 아무런 경력도 없는 아르카디오의 말을 들어주고 실행해준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말아달라는 요구를 철저히 지켜준 것은 고맙기까지 했다. 전략의 실행 과정에서 운도 상당히 따랐다. 그 운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인가? 아르카디오는 행운에 감사할 겸손함을 갖췄지만 행운을 믿지는 않았다.

그 모든 노력과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르카디오는 언젠가 다가올 최후의 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스테라는 끝내 제국에게 승리할 것인가? 아니다. 패배할 가능성이 크다.

 

아르카디오는 자신이 여전히 최초의 의견을 바꾸지 않았음을 이제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자부심 높은 오스테라 사람들은 승리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했다. 패배에는 관심이 없었다. 패배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쁜 예언을 차마 말하지 못한 예언자처럼, 아르카디오는 오스테라의 활기를 냉담한 눈으로 바라봤다.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러므로 자신은 계속해서 그림자 속에 남아 있어야 했다.

최후의 날, 칼리오 아르카디오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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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 뚜쉬뚜쉬 @안탈론 | 55레벨 | 전투 마법사 | 엘프
    그렇게 칼리오는 원나블 전권을 사서 지하방에 틀어박히고...
    2014-10-08 10:38
  • 나의영혼16 @크라켄 | 43레벨 | 그림자 투사 | 누이안
    1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14-10-08 10:39
  • 명석몽 @안탈론 | 51레벨 | 폭풍 추적자 | 페레
    오스테라를 구하되 본인은 죽는건가.
    2014-10-08 12:35
  • 라프 @안탈론 | 55레벨 | 마법사 | 하리하란
    안타깝다, 파비트라랑 이샤마.. 대화의 부재와 서로에 대한 환상때문에 어긋나는게 ㅠㅠ
    2014-10-08 12:59
  • 박루싶 @에안나 | 50레벨 | 첩자 | 하리하란
    아르카디오가 해야 할 일이라는게 파비트라를 죽이는것같네요.
    2014-10-09 13:37